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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튼애플 Jan 28. 2020

<가버나움> 뜨거운 외침이 따가운 파편으로 꽂히는 영화

레바논 난민의 실제 삶을 작품으로 담아낸 영화 가버나움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듯한 모습의 한 아이. 이 소년의 이름은 자인.


자신의 나이도 정확히 모르는 이 소년은 재판장에 끌려와 있다. 그는 아사드를 흉기로 찌른 혐의로 소년 교도소에 수감 중인 상황.


그런데 이번에는 그 죄목이 아니라, 원고 측으로 재판장에 섰다. 그가 고소를 한 건, 그의 친부모.


영화 가버나움 줄거리


그가 부모를 고발한 이유를 알기 위해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수많은 아이를 낳았던 자인의 부모는, 아이들에게 노동을 시키며 생활비를 벌어오게끔 했다.


한편, 자인이 살고 있는 건물의 건물주이자 식료품 가게 주인 아사드는 자인의 동생 사하르에게 눈독을 들인다. 사하르에게 줄 선물을 주는가 하면, 어떻게든 그녀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사하르의 생리가 시작되자 자인은 더 큰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부모가 돈을 벌기 위해 사하르를 어딘가로 팔아버릴까 걱정한 것. 그래서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한다.


하지만 불행은 소리 없이, 그리고 너무나 빠르게 다가온다. 아사드가 사하르와 함께 나란히 앉아있는 걸 보게 된 자인.


그는 불만의 화살을 동생 사하르에게 돌린다. 그리고 가만히 있다가는 동생을 빼앗길 거라 생각했는지, 사하르와 함께 도주 계획을 짜는 자인.


라면 몇 개랑 생리대를 훔치고 버스비까지 알아본 자인은 사하르를 데리러 간다. 그런데 이미 아사드에게 사하르를 팔아 넘기기로 결정한 그의 부모.


자인은 사하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끝내 아버지를 막지 못한다.


이에 상처를 받고 무작정 집을 떠난 자인. 조그만 동네 유원지에서 일거리를 찾고자 하지만, 어린아이인 자인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원지에서 유일하게 자인의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라힐. 갈 곳이 없자 퇴근하는 라힐을 뒤따라가는 자인.

그녀는 조악한 판자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녀에겐 어린 아들 요나스도 있었다.


먹고 재워주는 대신 그녀의 아들을 돌보게 된 자인. 처음엔 어색해 보였지만, 역시 많은 동생을 돌본 경험 덕인지, 금세 요나스 돌보기에 익숙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자인을 거둬준 라힐 역시 안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가짜 신분의 체류증을 만들어 간신히 정착을 하고 있던 것.


설상가상 체류증 기간이 만료되며 새 체류증을 위조해야 했지만 그녀에겐 돈도 시간도 부족하게 된다.


심지어 불법체류자라는 걸 악용한 고용주들 때문에 제대로 된 임금도 받지 못한 상황. 그래서 머리카락을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는 지경에 다다른다.


그런데 어느 날, 라힐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걱정이 된 자인은 그녀를 찾기 위해 몇 가지 단서만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 나선다.


알고 보니 라힐은 불법 체류 사실이 드러나 체포된 상황. 이러한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자인은 혼자서 요나스를 돌보게 된다.


보드에 양동이를 얹어 임시 유모차를 만든 자인은, 집안 살림살이를 팔아 치우며 간신히 식비를 조달한다.


하지만 점점 돈을 마련할 방법이 줄어들자, 그는 부모와 함께 살았던 때처럼 다시 불법적인 약물 주스를 만들어 팔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부모의 무관심과 학대를 피해 가출을 선택한 소년 자인. 하지만 그렇게 떠나온 곳에서도 그는 방치되어야만 했다.


과연 자인은 요나스를 제대로 키워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집을 떠나온 그가 아사드를 찌르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영화보다 냉혹한 현실을 겨냥하다


이 영화는 놀랍게도 연기자가 아닌 일반인을 캐스팅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특히나 캐스팅된 배우들이 실제 난민이었다는 점은 놀라움을 더하고 있다.


주인공 자인은 배달 일을 하던 시리아 난민 소년이었으며, 라힐 역시 불법 체류자로 지내왔던 인물.


이러한 설정은 단순히 이 영화가 픽션의 그치지 않고 현실을 저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물론 영화의 시나리오는 실제 사건이 아니라 감독이 만들어낸 허구의 스토리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레바논에 살던 어린아이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학교는 꿈도 못 꾸고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삶, 반복되는 부모의 방임과 학대, 그리고 돈 몇 푼 때문에 어린 동생이 팔려나가는 상황까지.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그렇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었던 것. 그렇게 길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은 자연스레 위험에 노출된다.


그들은 자신의 몸집만 한 짐을 옮겨야 했고, 자연스레 폭력의 위협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가 원망스러워 고소한다는 자인의 이야기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던 것이다.


더 충격적인 건, 이러한 상황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 그들은 아이들에게 노동을 시키고, 딸을 팔아넘기는 행위에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구차한 변명만을 내뱉을 뿐 아이를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자인이 아사드를 찌른 뒤 교도소 면회를 갔을 때도, 그의 엄마는 태평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 진심으로 그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인이 느끼는 분노와 고통이 유난히 더 깊었던 건, 단순히 열악한 경제적 환경 때문이 아니라, 뿌리 깊게 박힌 부모의 무관심과 학대였음을 영화는 고발하고 있었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건네주는 사랑의 무게


자인은 분명 부모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동생들에겐 진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가장 먼저 그가 유난히 아끼던 동생 사하르와의 관계. 자인은 바로 아랫 동생인 사하르를 살뜰히 챙긴다.


그녀가 생리를 시작하자 부모에게 그 사실을 감추는 데 집중하는 한편, 아사드에게 사하르를 팔아넘길 게 뻔해 보이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도 한다.


물론 그의 투쟁은 쉽게 꺾여 버린다. 아무리 생활력이 좋고 강단이 있는 자인일지라도, 다 큰 성인인 아버지와 어머니 두 명을 상대하기란 버거웠기 때문.


그렇게 가출을 한 뒤, 친형제처럼 가까워진 라힐의 아들 요나스에게도 그는 좋은 형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까칠하게 구는가 싶었지만, 이내 가까워졌고 요나스를 친동생처럼 소중하게 여긴다.


이 부분이 가장 잘 드러났던 건 음식을 구하던 자인의 모습. 요나스도 분명 어린아이지만, 12살밖에 되지 않는 자인 역시 아이라고 봐야 한다.


당연히 자신의 배고픔, 자신의 피곤함을 가장 먼저 신경 쓰고 싶은 소년의 모습을 보이는 게 정상적인 행동이었을 것.


하지만 그의 행동은 달랐다. 자신의 음식을 구하는 것보다, 요나스가 먹을 음식이 언제나 최우선이었다.

피로 맺어진 관계는 분명 아니지만 자인은 라힐과 요나스를 가족이라 여기고 소중히 대했고, 철없는 행동을 벌일 만한 상황에도 동생 요나스를 배려하는 행동만을 했다.


물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인의 사랑이 완벽하지만은 않았다. 어떤 일을 할 때 방해받지 않기 위해 요나스의 발목에 줄을 묶어 두었기 때문.


이 행동은 그가 요나스를 벌주기 위해 했던 행동은 아니다. 위험한 일로부터 요나스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기에.


결코 세련된 방법은 아니지만 줄로 묶는 건 그가 친부모와 살 때 너무나 익숙하게 봐왔던 광경.


그렇기에 자인은 이 행동이 잘못된 행동인지도 모르고 따라 했던 것이다.


이런 서투른 행동이 있었음에도 동생을 향한 자인의 사랑은 언제나 반짝였다.


비록 자신은 사랑받지 못했지만, 동생들에게 무관심 대신 사랑을 물려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조숙할 수밖에 없던 그의 모습은 안타까웠지만, 동생들의 ‘아이다움’을 지켜준 그의 행동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부분이었다.


뜨거운 외침이 따가운 파편이 되는 영화


작품은 시종일관 어둡고 탁한 분위기에서 흘러간다.


중간중간 평화로운 장면도 있었지만, 그 평화로운 장면 역시 간신히 어둠을 덮고 있던 얇은 천 조각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어설픈 위로를 건네려 하는 방관자들의 태도 역시 지적하고 있었다.


종교단체에서 봉사라는 명목으로 수용소를 찾아와 즐거운 음악을 틀고 그들을 위로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들을 지켜보는 불법 체류자들의 표정은 전혀 밝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노력에 호응하듯 일어나서 분위기를 맞추는 사람도 있지만, 몇몇은 뜨거운 눈물을 토해낼 뿐이었다.


우리가 가볍게 던지는 위로라는 말의 가치가 얼마나 덧없는지를, 그리고 우리가 보내는 안타까움의 시선이, 상대에겐 어떻게 다가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자인이 토해내는 뜨거운 분노는 이내 부서져 작은 파편이 되어 관객들의 가슴에 따갑게 박힌다.


암울한 시대상과 인간 다움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속,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던 관객 자신에게 안타까움, 혹은 그 이상의 부끄러움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이 칼처럼 심장을 찌르네요

이 대사가 유난히 아프게 다가왔던 건, 단순히 그의 심장을 겨냥한 말과 행동이 그의 어머니만의 잘못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추락할 곳 없이 빈민층을 벼랑 끝으로 몰릴 수밖에 없게 만든 사회 환경 역시 일정 부분 책임이, 그리고 그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역시 어느 정도의 죄의식은 가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영화는 난민 소년 자인의 문제를 시작으로 점점 더 시각을 넓혀가며 관객들에게 충격을 심어주고 있었다.


단순히 난민 소년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범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난민 문제, 그리고 그 속에서 위험에 노출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뤘던 영화 <가버나움>이었다.


https://youtu.be/ARcCnNbLu3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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