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인정하고 마주하는 일은 괴롭다. 나는 작은 사랑의 그릇을 가졌다.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내 기준의 최선이다. 그릇이 작다. 아이에게는 턱없이 부족했을 사랑.
A군 사건으로 심란했던 저녁, 8살 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엄마가 너를 사랑하긴 하는데, 가진 것이 너무 작아서 줄 것이 별로 없어. 정말로 미안해.”
“엄마! 사랑이 뭐야?”
“사랑? 엄마도 몰라. 사랑이 뭐야?”
“나를 먹여주고 잘 보살펴 주면 그게 사랑이야. 엄마는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 진짜?”
“응. 엄마는 나를 잘 봐주기만 하면 돼.”
보육원 봉사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본인에게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더니, “나만 바라봐!, 다른 얘들 쳐다보지 말고, 나만.”
그 말을 듣고 가슴이 푹~ 하고 찔린 것처럼 아파, 가슴이 철컹~ 내려앉았다.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 같아 아이한테 너무너무 미안했다. 아이를 안아주기는 했지만, 그 아이가 바라는 대로 아이만을 바라봐주지는 못했다. 봉사는 모두를 위한 행위라 한 아이만을 위한 시간을 내주기가 어려웠다.
모두에게 주는 그런 사랑 말고, 나만 바라보고 나를 특별히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이에겐 필요하다. 어떤 아이에게는 엄마가 있어도 엄마가 없다. 아이를 바라봐주지 않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도 삶이 괴롭다는 이유로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나는 아이가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채워줄 수는 없지만 바라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존재만으로도 쓸모가 있다. 잘하고 있다는 딸의 말이 위안이 된다.
보육원에 있던 한 아이가 파양 되어도 좋으니 단 하루라도 자기에게 엄마가 존재한다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남자아이, 돌이 넘은 아이, 아픈 아이에게는 입양의 기회가 희박하다. 아이는 보육원에 입양부모가 될 법한 어른들이 방문하면 자기 뺨을 때렸다고 했다. 얼굴을 때리면 벌게지면서 혈색이 좋아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면 입양의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뺨을 때리고, 또 때리며
‘하느님! 다른 얘들은 다 부모가 있잖아요, 엄마가 있잖아요? 그런데 왜 나한테만 없어요? 나만 왜 벌줘요? 제가 그렇게 미워요? 저한테도 기회를 달라고요’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하느님께서 자신에게도 가족을 허락하시기를 아이는 매일 밤, 울면서 기도했다. 하지만 결국 들어주시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