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하나 입양한다고 뭐 인생 180도 바뀌나?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고. 얘 낳아봤자 기저귀, 분윳값 버느라 고생만 하지. 그러다 아~ 이제 내 인생 좀 살아볼까, 하면 50살, 60살 되어서 인생 즐기고 싶어도 즐길 젊음이 사라지더라.’
아이가 짐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인생에 방해꾼이 되는 존재, 그래서 결혼은 해도 아기는 안 낳는다는 딩크족이 생긴다. 세상은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졌으니 그들을 나무라거나, 너의 생각이 틀렸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냥 나는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뿐이다.
아기가 오고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 만난 지 1~2주 만에 위탁을 시작했다. 안녕~ 하자마자 부모. 자식 간의 사이가 되었다. 어제까지 자유였던 내 시간은 아기를 위한 시간으로 바뀌었고, 아기 띠를 매고 밖을 나가면 ‘아기엄마’란 새로운 호칭으로 불렸다. 어색했다. 내가 한 결정이지만 아기 얼굴을 말끄러미 볼 때마다 ‘네가 정말 내 자식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2018년 8월 마지막 주에 아기가 집으로 왔다. 그해 여름은 역대급 더위라고 뉴스에서 떠들어대던 해다. 너무 더워 하루에 샤워를 몇 번씩 해도 더웠다. 아기가 올 무렵, 다행히 더위는 한풀 꺾였다. 베란다 창문 사이로 가을을 알리는 바람이 한 번씩 집안을 훑고 지나갔다. 늦여름, 매미 소리가 열어둔 창 사이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파트 화단 나무 위 매미들이 마지막 사력을 다해, 구애를 펼치고 있었다. 아이들과 남편은 모두 학교와 직장에 갔고 나와 아기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기는 울다가 자다가를 반복했다. 집으로 와서 일주일간은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낯선 환경과 가족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울다 지쳐 까무룩 잠이 들면 물끄러미 아기를 바라보았다. 낯설었다. 외계인이 우리 집에 와서 ‘삐리삐리뽀~ 너는 이제부터 네 엄마이니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하라. 삐리삐리~’라고 텔레파시를 보내며 잠자고 있었다. 입양이라 낯선 것이 아니라 출산 때도 그랬다. ‘내 배 속에서 태어났다고? 넌 어디서 왔니?’ 당최 이런 생명체가 내 배 안에서 태어났다니.' 친자도 시간과 정성의 과정을 거쳐 서서히 서로에게 적응해 나갔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낯섦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 거실 한가운데 누워 들숨, 날숨을 쉬고 있는 아기의 존재가 신기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갑자기 툭, 하고 우주에서 떨어져 이제 너희는 엄마와 딸이니 그런 줄 알라고 신이 말해주는 듯했다. 집은 고요했다. 고요한만큼 아기의 숨소리는 크게 들렸다. 숨을 쉴 때마다 아기 배가 볼록 올라왔다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아기의 숨은 작고 연약했고 부드러웠다.
나는 이 아기에게 어떤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혹시나 더 좋은 가정에 갈 기회를 우리가 빼앗았나?
미래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되어 있을까?
그 작은 숨을 보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때로는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생각들., 걱정과 설렘이 교차하며 파도를 타고 밀려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했다.
나는 원가정 안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를 강요당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라.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일을 해야 한다. 결과물을 만들어라' 등등. 그래서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거나 효율적인 일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나의 쓸모를 오랜 기간 찾아 헤맸다. 경제활동을 모두 접고 육아에 전념하기 시작할 무렵, 직업란에 전업주부라고 적으며 남모르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를 존재로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직업, 활동, 부와 성공이란 껍데기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남들과 뭔가 다른 척했지만, 사실은 비슷하거나 못한 인간일 뿐이었다. 입양을 준비하며 ‘엄마’의 부재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알았다. 그 아이들의 소원은 하루라도 내 엄마, 가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엄마라는 존재가 이렇게 위대하고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워킹맘들을 보며 스스로 작아지곤 했는데, 엄마는 존재만으로 위대하다.
아기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의 쓸모를 생각했다. 그 위대한 생명의 움직임을 보며 내 쓸모를 아예 스스로 결정했다. 그래, 선율이 되자. 내 안에서 음악이 흘러나와 공기를 가르며 미세한 공기의 파동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선율이 되자. 아기의 숨소리에 맞춰 내 숨소리를 맞추고, 너의 웃음소리에 맞추어 웃자. 그러면 아기는 울음 대신 옅은 미소를 지어줄지도 모른다. 아기가 잠을 못 이루고 뒤적뒤적 뒤척일 때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자장가를 불러줄 것이다. 언젠가 성장해서 지나가는 바람결에도 엄마의 자장가를 설핏 기억해 낼 것이다. 이러한 작은 선율들이 모여 큰 줄기의 음악을 이루면 네 안에서 아름다운 파동이 넘치고 흘러서 부드러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다른 이들이 너로 인해 평화롭고 행복해할 수도 있다. 내가 음악이 되고 네가 노래가 되어 우주에 퍼지고 그 뒤에는 조용한 평화가 물결처럼 흐른다.
거창한 나의 쓸모에 웃음이 절로 난다. 이루어지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이 순간 너의 들숨, 날숨을 보며 나에겐 차분한 평화가 흐른다. 너의 선율이 나의 선율과 합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