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래!”
부쩍 살이 쪄서 옷이 꽉 낀다. 그래도 선은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내 옷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들어온다. 유치원에서 〈내가 태어나는 과정〉을 배운 다음부터다. 친구들은 모두 자기 엄마 배에서 태어났다는데, 자기만 엄마 배에서 태어난 게 아니고 다른 엄마 배에서 태어났다고? 무슨 말이지? 6살 아이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아니, 이해하기 싫은 게다. 왜 나만 다른 엄마 배에서 태어난 거야?, 미르 엄마 배에서 태어날 거야, 하면서 또 내 티셔츠 안을 비집고 들어간다. 사실 나는 완전히 선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한다. 티셔츠 안에서 울먹이는 아이를 그저 쓰다듬어 주는 일밖엔 할 수 없다.
그럴 땐, 이야기를 해준다. 내가 만든 이야기다.
《 옛날, 옛날에 하느님이 기름지고 비옥한 땅에 씨앗 두 개를 심었어. 하느님께서 물을 주고 잘 보살펴준 덕분에 드디어 싹이 나게 되었지. 그런데 하느님은 한가지 고민이 있었어. 그곳은 씨가 싹을 틔우기에는 좋은 땅이었지만, 더 크고 단단하게 자라기에는 부족했어. 그래서 어린싹일 때, 잘 자랄 수 있는 좋은 땅으로 옮겨야만 했어. 하지만 옮기는 과정에서 풀잎과 뿌리, 땅에는 깊은 상처가 남게 되기에 고민이 되셨어. 하지만 하느님은 두 어린잎을 옮기셨어. 두 풀잎의 운명은 그때부터 갈리게 된단다. 한 풀잎은 그 상처를 끌어안고 아파해. 상처가 아파서 하느님과 세상을 비난하기 시작하지. 매일매일, 비난과 고통의 물을 주어. 그 식물은 무럭무럭 자라서 그 상처 안에서 가시덤불이 자라게 되었어. 상처 안에 난 가시덤불은 더 강력하고 뾰족했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식물들까지도 아프게 찔렀어.
이제 나머지 다른 잎에 대해 말해줄게. 상처는 똑같았어. 마찬가지로 아팠지. 하지만 이 싹은 ‘좋은 땅으로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난 자리 땅과 아파하는 내 자매를 도와주세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세요’라며 기도했어. 그리고 늘 감사와 기도, 축복 등 긍정의 물을 매일매일 자신에게 주었어. 어떻게 되었냐고? 이 풀잎의 상처에서도 뭔가가 자라기 시작했어. 똑같이 가시덤불이었냐고? 아니야, 꽃이 피기 시작했어. 상처에서 난 꽃은 다른 곳에서 난 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단다. 향기도 아주 진했지. 그 향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켰어. 또, 꽃의 자태를 보며 아름다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 상처 입은 사람들이 벌처럼 그 꽃에 모여들었어. 그 꽃의 향기를 맡고, 보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치유가 되었거든. 같은 땅에서 씨가 뿌려지고 싹을 틔웠고, 같은 상처를 입은 후 같은 땅으로 옮겨졌으나 한 식물은 가시덤불이, 다른 식물은 꽃이 되었어.》
선! 가시덤불이 될 거야? 꽃이 될 거야?
꽃.
그래, 꼭 꽃이 되거라. 넌 진짜 아름다운 꽃이거든.
성당에서 할머니 자매님이 참치 통조림 몇 개와 상추가 담긴 검정 비닐을 나에게 건넨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속죄의 값’이라 한다. 무슨 속죄냐고 물으니 눈가에는 물기가 차오른다. 묻지 말란다. 그러니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우리 집 문고리에는 고추가, 고구마가, 토마토가, 김치가 주렁주렁 열매처럼 매달려 있는 날이 많다. 누가 주었는지 알 때도 모를 때도 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주시는지는 알고 있다. 선이다. 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한두 명만 알아도 그런 일은 발이 달린 것처럼 퍼져나간다.
키울 수 없어 뱃속에서 아이를 보내버린 사연, 아이가 너무 많아 어딘가로 떠나보낸 일, 자식 키우면서 잘 해준 게 하나도 없어 아팠던 마음, 업둥이로 키운 자식이 집을 나가버려 갈기갈기 찢어졌던 마음, 부모 없이 자라 힘들었던 본인의 상처. 형제, 자매를 일찍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상처 등. 노인분들은 그런 아픔 하나쯤은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사신다. 그들은 선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선은 그 할머니들의 아픈 자식이며, 아프고 힘들었던 본인이다. 6살 내 딸. 선은 그렇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었다. 말은 필요 없다. 그들은 선의 존재를 보며 아파하고 속죄한다. 아직 선은 꽃도 피지 않은 어린잎인데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 기억을 떠올려주고 속죄의 길을 열어준다. 그래서 우리 집 문고리에는 주렁주렁 속죄의 선물들이 매달려 있다.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 했다. 주시지 말라고, 본인 드실 것도 없는데 힘겹게 텃밭 일궈서 왜 주냐, 했더니 화를 내신다.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러는데 왜 못하게 하냐고 오히려 역정 내신다. 검은 봉지 안에 들어 있던 상추와 고추 등은 선에게 준 게 아니다. 그들의 과거 속 상처받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화해의 메시지와 선물이다. 그러니 받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 앞에 누가 아기를 버리고 갔거든. 내가 아기를 못 낳았어. 그걸 알고 키울 수 없는 아기를 우리 집 앞에 놓고 간 거야. 그래서 걔를 16년을 키웠어. 업둥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그런데 결국 집을 나가버렸어. 친척이랑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야. 내 나이가 지금 80이 다 되어 가는데, 걔가 자꾸 눈에 밟혀. 어디서 잘살고 있나, 밥은 먹고 다니나? 궁금해. 자식이 없어서 난 정말로 하느님이 주신 자식이라 여기고 사랑했거든. 그런데 내가 그 아이한테 매를 많이 들었어. 난 내 자식이라 생각해서 잘되라고 그랬던 건데, 만약 내가 덜 때렸다면 안 나갔을까? ”
할머니의 눈은 그리운 자식과 함께했던 시간 속으로 어느새 가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제발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래?’라고 말하듯 했다. 눈가에는 아들을 잃어버린 후회와 그리움의 나이테가 새겨진 듯 주름이 자글거렸다. 그녀는 선의 등을 어루만졌다. 선이 아니라 과거 자신의 6살 아들을 어루만지고 있는 듯했다. 잘 키워, 잘 키우라고. 나에게 하는 말인지 과거의 본인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난 그저 선의 상처에서 가시덤불이 아닌 꽃이 피기를, 향기가 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