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으로 키우면 안되나요?

편견과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

by 한여름


외동딸로 키우기로 결정하기까지의 고민이 담긴 글을 발행했다.


어떤 이가 내게 조언을 했다. 외동딸은 외골수가 되고, 그 부모는 편향적일 거라는, 군 가산점 문제와 여성 관련 사회문제에 편향적이 된다는 짧디 짧은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말은 마음으로 와 쿡 박혔다.


왜 함부로 말하는 걸까. 그리 어렵게 결정했다고 했는데 내 글을 다 읽기는 한 걸까. 선택지가 없는 사람에게 어쩜 이리 딱 잘라서 말하는 걸까. 외동을 얼마나 겪어 봤기에 이런 확언을 하는 걸까. 나를 파고드는 그 불편함이 마음에 가시를 심었다. 머릿속에 온갖 부정적인 말들이 떠다녔다.


여성과 관련된 사회 문제에 편향적이라는 것은 어떤 뜻인 걸까. 같은 여성이기에 공감하고 때로는 함께 분노하는 일이 '편향적이다'라는 말로 분류될 수 있는 걸까. 군 가산점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이어야만 편향적이지 않은 걸까. 어차피 어느 쪽이든 '편향적이다'라는 꼬리표가 붙을 수밖에 없는 이슈일 텐데. 그렇다면, 딸을 둘 가진 부모는 어떠한가. 남자의 군 가산점 문제를 모두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아들 형제를 가진 부모는 어떠한가. 여성과 관련된 사회문제에 모두가 무관심한가.


게다가 외골수라니, 단 한 곳으로만 파고드는 사람이라는 뜻의 외곬. 외곬은 나쁜 것일까. 나쁜 뜻으로 종종 사용되어 오기는 했으나 모든 것에는 그 면면이 있는 법이다. 외골수라는 표현을 나쁘게 바라보는 시대는 지났다. 두루두루 둥글게 둥글게 좋게 좋게 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나는 형제가 있지만 어쩌면 '선택적 외곬'이다.


당장이라도 키보드를 두드려 그분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내가 찔린 만큼 상대방을 찌르고 싶은 마음이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그 마음을 깊숙이 눌러 담았다.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라고 화를 낼 거라면 모두가 보는 곳에 글을 쓰면 안 되는 거였다. 일륜적인 위로와 공감의 반응만을 원했다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는 편을 선택했었어야 했겠지.


그럼에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화가 나는 틈을 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나를 붙들었다. '너는 그런 적 없어? 너는 외동아이를 나쁘게 바라본 적 없어? 정말 없어?'


있다. 그런 적이 있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친구와 아이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외동으로 키우긴 싫어. 이기적이잖아 외동은. 아무리 엄하게 키워도 그게 안되나 보더라고.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짝지가 외동이 있었는데 엄마 아빠가 외동이라서 엄청 엄하게 키우신대. 그런데 좀 달랐어." 그런 근거 없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친구와 절대 외동은 안된다고 둘은 낳자고 근거 없는 말을 근거 삼아 아이 계획을 결론지었다.


외동인 아이가 조금이라도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보이면 그 또래 아이들이 다 그런 줄 알면서도 한 편으로는 ‘외동이라 그런가 보네.' 하는 마음을 두었다. 그 사실을 절대 부정하지 못한다.


나는, 나를 찌른 그 사람을 탓하기 이전에 먼저 나의 지난날을 찌르고 되돌아보아야 했다.






나의 인생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몇몇 사람이 있다.

중학교 시절, 무리에 친구들을 돌아가며 왕따 시키는 아이가 있었다. 여섯 명은 돌아가면서 따돌림을 당했는데 키도 덩치도 우리 중에 가장 작았던 그 아이의 말을 누구도 거스르지 못했다. 그 시절 그 행동이 얼마나 나빴는지 우리는 아직도 그때를 기억한다. 그 아이에게는 형제가 있었는데 왜 그리도 이기적이었을까.


고등학교 시절, 마음이 누에의 고치처럼 뽀얗고 가느다랗고 연약하던 '그 시절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체육선생님이 계신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런 건 선생도 아니야’라고 험한 말을 하고야 마는 딱 한 사람이 있다. 담임을 맡은 반의 대학입시 성과를 위해 성적이 탑이던 친구와 다툰 나에게 "너 정신병자야?"라는 말을 뱉은 사람. 친구의 성적이 떨어질까 조마조마했던 나머지 나를 불러서 한 말이 고작 그런 말이었다. 그분에게도 형제가 있었을까? 아님 외동이었을까?


사람들 속에 함께 살아가다 보면 이기적인 사람도 만나고, 편향적인 사람도 만난다. 그 사람들을 외동이냐 아니냐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외동은 외골수가 되고 그 부모는 편향적일 거라는 확언을 나는 부정한다. 혼자 자란 아이가 이기적인 아이로 자랄 확률이 더 높은 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한들 형제와 함께 자란 아이는 이기적 일리 없다는 것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형제와 자라며 품이 넓고 유연한 아이로 성장할 수도 있겠으나 결핍으로 주눅 들거나 집착과 열등감에 사로 잡힌 아이도 많이 보아왔다. 혼자 자란 아이가 이기적인 성향을 띠는 경우는 혼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뿐인 아이를 향한 부모의 삐뚤어진 사랑, 잘못된 사랑법 때문이 아닐까. 혼자 자라든, 함께 자라든 부모의 올바른 사랑이 아이의 인격에 커다란 구심점이 되는 것은 동일하다.


외동으로 기른다는 것은 그리고 외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와 같은 부정적인 인식과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라는 걸 아프게 깨달았다. 그런 인식을 짊어지고 또 하나씩 깨트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음에 미안함이 겹겹이 쌓여갔다. 나 또한 그 인식 속에 갇혀 살았기에, 그 인식을 굳건히 다지는 데에 기여한 사람이기에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마음이 아팠다. 내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도 외동에게 그다지 녹록지가 않겠구나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은 머릿속을 내내 떠다니는 부정적인 말들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다.





나는, 마음으로 와 쿡 박혀버린 그 말을 흘려보내기로 했다.


흘려보내지 못하면 ‘외동이라서 그렇다는 말을 듣게 할 수 없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이를 혹독하게 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아이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그 이상의 훈육을 견뎌내야 할 것이며, 그건 결코 아이에게 득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늘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자신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느끼는 순간 어긋나기로 결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정도’를 가면 된다. 잘못된 건 잘못된 것이라고 잘한 건 잘했다고 하면 된다. 외동이라서 더 호되게 혼낼 필요도, 외동이라서 더 엄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가 사랑을 줄 줄 알 것이며, 사랑에 목마르지 않은 아이가 의미 없는 사랑에 목메지 않을 것이며, 사랑을 충만히 품은 아이가 스스로를 소중하게 대할 줄 알 것이며, 자신을 소중히 대하는 아이는 타인도 소중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 알 것이다.


나눌 줄 아는 마음은 연습되기도 하지만 자신이 충분하다고 느낄 때 자연스레 나눔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또한 부모가 '나눔'의 가치를 아는 아이로, ‘선행함으로' 기르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가 혼자 자라면 외골수가 될 거야, 딸만 키우면 나는 편향적이 될 거야 라는 생각 따위에 사로 잡혀 둘째를 낳아야겠다고 결정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아이를 고민하는 일은 그것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를 많이 안고 있다.

예를 들면 나의 생명, 그리고 한 아이의 생명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나는 결국 조언을 해 준 분께 구구절절 장문의 글을 되돌려주고야 말았지만, 글의 말미엔 아이를 잘 키우겠다고 했다.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회 구성원으로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부모라면 누구나 그런 고민 속에 하루를 보내지 않느냐고. 그리고 감사하다고 했다. 그것은 그분의 말로 인해 나의 지난날 과오를 곱씹어 볼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진심이었다. 나의 한 때를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준 것에 대한 감사함.


잊지 말아야지. 내가 그토록 편협한 사람이었음을. 내가 그토록 부끄러운 사람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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