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하고 염려하는 부모의 사랑법.

염려하고 사랑하고.

by 한여름


마음이 가장 잘 맞는 대학 친구는 내가 사는 곳과 제법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고속도로를 1시간가량 달려야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우리 둘은 나란히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아이가 조금 자라고나서야 서로의 집으로 다녀가기를 시작했다. 오랜 시간을 지나 다시 만나도 그간의 공백이 우리에게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만남의 시간을 더 해 갈수록 즐거웠고 그 시절 우리가 왜 그토록 서로에게 끌렸는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가 있어 자연스레 바뀌어버린 대화 주제에도 몸에 꼭 맞는 옷을 지어 입은 것처럼 편안하다. 늘 그래 왔듯이 그녀와의 대화는 나를 허물어 뜨리고 한층 더 생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또한 그녀는 스무 살의 그때처럼 나를 자신의 소중한 사람의 자리에 머물게 한다. ‘소중한 사람의 자리’에 둔다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에 꽃을 피운다.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것' 무엇이 이보다 더 봄일 수 있으랴.


여느 날처럼 아이에 대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다 문득 깨닫게 된 것이 있는데 "우리 애는 늦어서.."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이 이상했던 건 무엇보다 친구의 아이는 5살에 이미 한글을 모두 읽고, 수를 십 만단 위까지 읽을 줄 아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로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빨리 말하라고 했을 때 아이에게 정말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빨리 알아가더라는 것이다. 오히려 빠르다면 빠른 아이. 그런데 왜 자꾸만 '느리다'라고 표현하는 걸까.


"아이가 벌써 글도 읽고 수도 빠른데 왜 자꾸 느리다고 해?" 하고 물으니, " 말이 느리잖아. 조카는 못하는 말이 없어. 진짜 큰 애처럼 말을 잘하는데 우리 애는 말도 느리고 기저귀도 얼마 전에 땠어...”라고 한다. 언제나 웃는 얼굴인 친구의 눈이 말끝을 흐리는 표정이 어째 조금 서글퍼 보였다.


조카는 말이 빠른 아이이고, 우리 아이는 글이 빠른 아이라고 생각해도 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 듯 보였다. 친구의 아이는 어릴 적부터 느렸다고 했다. 갓난아이에게 최고의 도전이었을 뒤집기라든지 머리 들기, 조금 더 자라면서 배밀이, 기기, 서기, 걷기. 어느 것 하나 빠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니 평균적으로 한다 하는 개월 수에 해준 적이 없었단다. 그러다 보니 주변으로부터 아이가 느리다, 늦되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으며 아이를 키웠다. 특히나 걸음마는 늦어도 너무 늦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16개월 즈음되어서야 엄마 아빠를 안심시킨 모양이다.


상황이 이 쯤되니 친구는 아이가 느리다는 말에 이골이 난 것 같았다. 아이에게 느리다는 인이 박힌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인지적인 측면은 월등히 빠르게 배워나가는데도 친구는 빠른 것보다 느린 것에 대한 걱정을 품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아이의 발달이 빨라야 한다고 믿는 조기교육파 엄마이거나, 뭐든 다른 아이와 비교하려 드는 예민한 엄마가 아니다. 엄마로서의 친구의 모습은 내가 아는 그 어떤 엄마보다 아이를 믿고 따라주는 엄마이다.


11층인 아이의 집을 올라가며 아이가 9층 버튼을 눌렀다. "엄마 나 9층에서 걸어가고 싶어요" 나였다면 아이를 설득했을 것이다. 손님도 와있는데 안돼라고 단호히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친구는 "그래? 그럼 엄마는 짐도 많고 친구가 있어서 11층에 내릴 테니까 너는 9층에서 걸어 올라올래? 엄마가 위에서 기다릴게. 어때?"하고 묻는다. 그 순간 생각했다. '그래, 걸어 올라온다는 게 잘 못된 것도 아니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건 운동으로도 좋은 건데 화낼 일이 아니지.' 그렇지만 엄마가 되고 나서 알면서도 잘 되지 않는 일이 참 많다. 짐이 많을 때, 손님이 와 있을 때, 또는 할 일이 많을 때.. 아이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대충 흘려 넘기거나 아니면 결정을 바꾸려고 애쓴다. 엄마로서 친구의 태도는 사소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태도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른 일에도 늘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친구에게 ‘배운다’고 말한다. 어쩜 그리도 아이에게 언제나 상냥할 수 있느냐고. 나도 나름대로는 아이에게 친절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를 보면 정말 다르다고... 누구보다 아이의 말을 경청하고 아이의 말에 하나하나 정성스레 답해준다. 작은 물음에도 손에 든 일을 잠시 멈추고 반응하며 대부분 눈을 바라봐주고, 늘 웃는다. 언제나 밝고 명랑한 톤의 그 목소리 때문인지 아이도 밝고 구김이 없다.


함께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오랜 시간 현장에서 일을 하며, 아이들 간의 발달 차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 시절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친구의 마음에 불안이 살고 있는 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들어온 '느리다'라는 말이 친구의 가슴에 박혀 버렸기 때문이리라.


엄마가 되면 이전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감싸고 있던 지식과 기준, 우선순위와 가치관 등은 '무'가 된다. 오로지 아이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때때로 이성이 흐트러진다. 아무리 강단 있는 사람도 아이를 키우게 되면 물러지고 주변의 말에 비틀거리고 무너지고 넘어져 상처를 입고 만다. 그렇기에 아이에 대하여서는 함부로 판단하고 가벼이 말해서는 안 된다. '요즘 엄마들 극성이야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하게 해.'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물러진 마음에는 조심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무심결에 아니면 말고 식으로 던져진 말이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 자리 잡고 번져 나가기 시작하면 말한 이에게서는 잊힌 말일지라도 받은 이에게는 마음의 병이 되곤 한다.


나 또한 그냥 던져진 말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 '우리 아이가 정말 그런가', '그렇게 보이나', '내가 엄마라서 몰랐던 건가', '병원을 가봐야 할까', '엄마인데 왜 몰랐을까.' 사람의 말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를 붙들면 잘 놓아주지 않는다. 떼어내기가 쉽지 않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렇게 내 마음에 붙들린 말들이 참으로 많다.


모든 엄마가 아이를 걱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에게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이가 남들보다 더 잘 나길 바라서, 남보다 더 뛰어나길 바라서가 아닌 그저 내 아이를 염려하는 것이다. 아이의 오늘을, 아이의 내일을, 그리고 아이의 앞으로를 염려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어머니의 염려 속에 살아왔고, 어머니의 염려 덕에 살아왔다. 그리고 다 자라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성인이 되고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나는 어머니의 염려로 살아가고 있다. 그 모든 염려에는 대가가 없다. 대가 없는 염려이고, 대가 없는 마음씀이며, 그것은 결국 사랑이다.


한 사람을 키워 낸다는 것은 염려하고 염려하고 염려하는 일이리라. 그리고 염려한다는 것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마음씀이며, 사랑하고 사랑하고 몹시도 사랑한다는 뜻 이리라. 나의 어머니가 그러하듯 나 또한 나의 아이를 딱 그만큼의 무게로 사랑하고 있다. 이토록 사랑함이 행복을 만들어내고 이토록 행복하기에 불안하며 그 불안은 또다시 염려가 된다.


그렇게 친구도 나도 아이를 염려하며 마음을 관통한 말들에 상처 받고, 시간에 빌어 치유해나가면서 진짜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아이를 사랑함으로 더욱 염려하고, 더 깊이 생각한다. '나의 실수로 너의 인생에 자그마한 구멍이라도 생긴다면 견디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매일을 산다. 이런 무거운 마음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행복한 것은 내가 돌보고 있는 존재가 돌덩이가 아니라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매일 자라나는 위대하고 귀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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