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딤’보다 ‘헤아림’
아이를 기르며 가장 어려운 일은 오직 아이의 마음을 돌보는 일임을 하루하루 아이가 성장할수록 사무치게 느끼곤 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이의 마음을 돌보는 일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함께 돌보는 일 또한 만만치 않은 고행이었고, 그에 못지않게 어려운 과제는 육아공동체인 남편과 아이를 기르는 데에 있어 합을 맞추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부부들이 아이를 낳고 크고 작은 다툼의 과정을 지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순진하게도 아이가 태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자연스레 부모의 길을 걷는 육아공동체로서 친밀함을 느끼고 더욱 끈끈한 관계가 될 줄로 알았다. 저절로 그리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지나치게 낙관적인 로망일 뿐이었다.
남편과 육아로 인해 다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주변에 물었을 때는 대부분 서로 원하는 육아방식이 달라서 다툰다고 했다. 누구는 남편이 너무 까다로워서 또 누구는 남편이 너무 너그러워서 문제였다. 또 어떤 집은 남편이 육아에 관심이 지나치게 많아서 또 어떤 집은 관심이 없어서 문제였다. 다들 비슷비슷해 보이기도 했지만 다 똑같지도 않았다. 그 문제를 잘 해쳐나간 가정도 현재 진행형인 가정도 있었다. 아마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리라. 시간을 들여 맞춰가는 것이리라.
하지만 나의 문제는 좀 달랐다. 남편은 대부분 나의 의견에 따라주었고, 내가 조금 더 편한 쪽으로 결정을 내리기를 언제나 바라 주었다. 출산할 병원을 정할 때, 모유수유를 고민할 때, 이유식을 만들거나 배달을 시킬 때에도 언제나 내가 편한 쪽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되고 남편은 대부분의 시간을 옆에 있어주지 못했고 하루 12시간 이상 근무에 주말이라곤 딱 하루의 쉼을 가지는 남편을 둔 나의 육아는 오롯이 혼자만의 차지였다. 그렇다 보니 처음엔 배려처럼 느껴졌던 남편의 태도가 대체로 ‘의견 없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그 의견 없음이 나를 향한 배려라거나 나의 의견 존중의 입장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게 그의 ‘의견 없음’은 망망대해를 깃대 하나 꽂고 가야 하는 모험의 길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 들도록 했다. 모든 것은 홀로 결정해야 하며 모든 책임 또한 홀로 지어야 할 것이고 나의 결정의 실패 또는 오류에서 오는 모든 불편은 아이가 겪게 될 것이다. 또 그런 결과는 나를 짓누를 것이 분명했다. 결국 혼자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 내 맘대로 해도 태클 거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이 편하기는커녕 부담스러웠고 두려웠으며 외로웠다.
아이를 기르다 보면 정말 세세하게 결정해야 할 것들이 넘쳐난다. 아이에게 무엇을 먹일 것인지 어떤 재료로 만들 것인지, 아이를 언제 재울 것이고 어떻게 재울 것인지, 아이를 어떻게 훈육할 것이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하는 것들.. 더욱 세세히 들여다보자면 끝도 없을 그 결정들. 내복 재질부터 시작해 식재료를 유기농으로 쓸 것인지 아닌지 아이 반찬에 간은 언제부터 할 것인지 요즘 날씨엔 반팔이 나를지 긴팔이 나을지 앞머리를 잘라 줄지 말지 물티슈를 가지고 놀다 입 주변이 빨갛게 부어오르는데 병원을 갈지 약을 바르고 지켜볼지 아이의 밥 숟가락 물병 타입 하나까지도 모두 양육자의 결정에서 비롯된 것들이니 아이에게 양육자의 선택은 절대적인 부분이었고, 그 ‘절대적임’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곤 했다.
처음 엄마인 내가 뭘 그다지 현명함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여 정말 사소한 것 하나를 구입할 때에도 모든 결정을 인터넷 검색과 함께 했다. 아이의 이유식 그릇을 구입해야 한다면 어떤 걸 많이 쓰는지, 무엇이 좋은지, 어떤 걸 오래 쓸 수 있고 어떤 재질이 잘 깨지지 않으며 흡착이 붙어 있는 게 좋은지 아닌지 모두 검색해 본 뒤 구매를 했다. 틀린 선택을 하지 않으려 했고 실수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에 따른 불편함은 모두 아이의 몫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신중했다. 그러다 보니 밤이 늦도록 아이가 잠든 후에도 쉬지 않고 야근스런 날들을 보내기 일쑤였고 스마트폰이 나의 남편이자 육아 동지가 되어버렸다. 내게 모든 것이 맡겨진 다는 것은 결코 바라던 일이 아니다. 그의 의견 없음은 그렇게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알고 있다. 실은 아이의 물건을 구입하는 일은 나뿐만 아니라 남편 또한 어떤 의견을 가지기는 힘든 부분이라는 것을. 내가 서툴고 모르듯이 남편 또한 서툴고 모를 수밖에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이의 훈육이나 생활습관 등에 관한 것이라면 문제는 조금 달라진다. 그것에는 결코 ‘의견 없음’이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편이 아이의 훈육에 관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당연하게도 아이에 대한 이해, 훈육에 대한 이해, 그리고 육아 전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전문서적을 읽거나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비교해가며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야 하는데 육아에 의견을 가지기 위해서 육아서적을 뒤지고 육아 커뮤니티를 드나들 만큼의 여유가 그에게는 없다는 것이 또 문제이다.
자영업을 하는 남편에게 내가 아이와 씨름하며 보내는 그 시간과 같은 무게의 치열하고도 고단한 하루가 저 현관문 너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와 아이보다 더 일찍 잠을 깨 하루를 시작하고, 냉정한 저 세계에서 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어 따뜻함을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그의 하루가 나보다 더 나을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 1년 내내 회사원들의 그 흔하디 흔한 회식 한번 없이, 개인적인 약속 한번 잡은 적 없이 일이 마치면 곧장 집으로 온다는 것도, 개인적인 일에 시간을 쓰지 않은지 오래라는 것도, 주말에도 내내 나와 아이 옆에 있어 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모든 걸 이해할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 나날이 외로움의 시간을 삼켰다. 꾸역꾸역 삼켜 낸 그 시간은 결국 관계를 쥐고 흔든다. 나는 소화시키지도 못할 것을 삼킨 죄로 결국 다 토해내고 말 테니까.
나는 그저 나의 선택 나의 결정을 대신해줄 누군가가 아니라 나와 함께 앉아 검색해줄 사람, 아이의 일에 의견을 가져 줄 사람, 나의 혼란을 공감해 줄 사람, 나의 자책을 위로해 줄 사람, 아이의 오늘과 내일을 함께 걱정해 줄 사람, 태어나서 처음 하는 이 일이 내게 얼마나 낯설고 힘든 일인지를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 둘은 그대와 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견디는 것. 그것만이 답인 줄로 알고 꾸역꾸역 삼키는 연습만 한다. 그렇지만 삼키는 것. 견디기 위해 삼켜내는 것을 하다 보면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그러질 않았다. 삼켜내면 늘 탈이 났고 그것은 아무리 기다려도 익숙해지거나 내성이 생기지 않았다.
육아 동지가 될지 육아 원수가 될지는 각자의 몫이다. 힘이 될 것인지 짐이 될 것인지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선택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서로에게 어떤 태도여야지 짐이 아닌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원수가 아닌 동지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육아가 어렵다, 육아 지옥이다, 육아 전쟁이다 라는 말은 어쩌면 아이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치열한 부부의 세계를 일컫는 말이었는지도.
오늘도 우리는 서로에 짐이 되었다가 아주 가끔 힘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동지가 되었다가 원수가 되었다가 한다. 한 방향으로 걸어지면 좋을 텐데 어째 갈지자로 걷는 모양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한 방향으로 걸으려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서로가 아닌 우리가 되어 있지 않을까. 짐이냐 힘이냐를 굳이 따질 필요도 없는 좋은 부모의 모습으로 서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물론 그저 묵묵히 ‘견디는 것’ 만이 서로를 위하는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면 말이다. 육아 동지에게는 ‘견딤’ 보다는 ‘헤아림’이 실은 더 간절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