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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사내에 대한 그것을 알아버렸다
종이를 받았다. 빠르게 눈으로 종이를 훑어본다. 아무리 정당한 변명이라도 그 사내의 죄는 유죄다.
종이엔 어눌한 글씨로 다 틀리게 어설피 쓴 글자지만 무슨 사연인진 대충 다 알겠다.
사내의 어머니와 친형의 아버지는 원래 땅이 많은 만석꾼 집안의 후손이다. 집에서 일하던 머슴이 일본군의 압잡이가 되어 매수당한 뒤 땅을 모두 다 빼앗기고 집안이 몰락한다.
원래는 집안의 주인이던 사내 친형의 아버지가 머슴이 된다. 그렇게 전에 머슴이던 남자가 새 주인이 된 집에서 세 식구가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 원래 머슴이던 새 주인이, 지금은 머슴의 아내가 된 사내의 어머니를 임신시켜 첩이 되게 한다. 그 첩의 자식이 사내다. 첩살이하던 친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위로 있던 형은 어느 대감집 장자로 입적돼 집을 떠난다.
그리 되니 주인 마나님도 사내를 거둘 이유가 없다. 머슴인 의붓아버지와 사내를 내어 쫓아 그 집에서 영영 같이 쫓겨나고 만다. 친아버지는 죽은 첩자식인 사내를 나 몰라라 하고, 찾아가도 맞기만 하는데 그래도 또 찾아가 맞고 맞는다. 미련하게 한 번 맞으면 더 찾지 말지, 핏줄이라고 또 찾아가 맞고 맞는다. 핏줄이라면 맞아도 견디는 게 기본 도리고 당연지사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안 변하나 보다. 그리 자식을 패던 사내의 친아버지도 그만 술병에 폣병까지 와 명을 달리한다. 그 후론 친아버지 집에 발길을 못한다.
헌대 사내의 의붓아버지도 술고래셨나 보다. 술 앞에 개가 될 만큼 망나니가 될 만큼 술을 지나치게 드시던 분이었나 보다. 아님 만석꾼 아버지 밑에서 호의호식하며 남부럼 없이 살던 그 시절이 그리워 그러셨을까? 졸지에 머슴살이하고 졸지에 아내를 잃으면 그리 되나 보다. 졸지에 양아들이 생기면 그리 나쁜 심성이 들어서나 보다. 그래 술 드시고 어린 의붓아들을 그렇게 때리셨나 보다. 사내의 의붓아버지는 사내와 닮았나 보다. 아니 사내는 본래 자기 친아버지를 닮은 거겠지만.
사내는 알코올중독 의붓아버지가 싫어 도망쳐 집을 나왔지만 입에 풀칠이 급하니 곱겐 살지 못했을 거다. 앵벌이 구두딲이 소매치기까지 어쩌면 더한 것들도 했을지 모른다. 그러니 경찰에 잡혀서 소년원에도 다녀오고 그랬겠지 싶다. 친구 집에 얹혀살며 국민학교는 어떻게 졸업은 했나 보다. 어느 날 의붓아버지가 학교 앞으로 찾아오셨고 어딘가로 끌려가 또다시 술 때문에 맞은 모양이다. 얼마나 많이 사내를 때렸으면 화가 나서 의붓아버지를 죽였을까 싶다.
안타까움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로 맞았기에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미성년자 때 벌써 살인죄를 얻을 정도면, 사내의 의붓아버지의 폭행도 정당하진 않았을 것 같다.
소년원에 다녀온 뒤 껌팔이 신문팔이 구두닦이 칼갈이 자장면 배달 양계장 등 사내도 살아보려고 많은 일을 해 보았구나 싶다. 살아보려고 많은 것들을 시도한 그것은 어쩌면 나와 같을지도.
아니 내가 그 사내와 같은 것인가.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면서 이상하지도 안 이상하지도 않으면서 참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어쩌면 피의 힘일까? 소름이 돋는다. 핏덩이 피붙이 피가 섞인 관계, 그 피로 서로 하나로 묶인 인간들의 고통과 삶을 향한 처절한 사투, 지독한 상처의 연결고리… 대와 대를 잇고 또 그 대와 대를 이어 내려가는 상처의 강, 그 마르지 않는 강물의 위력이 참 독하고 악하고 거세다.
그러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택시 기사로 일을 시작한 그 사내. 하지만 참 그 본성 인성 심성 속사람은 바뀌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사내가 정말 새사람으로 살길 바랐다면 숙소에서 만난 엄마가 아무리 예뻤어도 그리 하면 안 되었다. 절대 그리해서는 안 되었었다.
#상상 속 아버지를 소설로 그렸지만, 내가 지난해 실제로 확인한 아버지의 가족들에 관한 모든 문서에서 아버지는 정말로 후처의 차남이었다. 작가적 상상력으로 아버지를 어떻게든 용서하고 싶어 내가 만든 아버지의 가짜 인생은 가짜가 아닌 참이었다. 진짜 그의 삶이었다. 참 충격이었다. 아버지의 그 드라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