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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민 Jan 02. 2021

내 삶이 실패되는 까닭

역대하 36장에 나타난 인생 실패의 원인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이민국 가운데 멕시코가 있었던 사실을 모르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위기를 맞은 시절, 1033명의 조선인들은 망해가는 조국을 등지고, 말 한마디 통하지 않던 머나먼 이국 땅, 멕시코로 떠났습니다. 멕시코는 에네켄, 애니깽이라고도 하는 선인장 종류의 식물 원산지로 유명했는데요, 이 에네켄은 범선이나 함선을 만들 때 주로 사용하는 로프의 원료였습니다. 당시 식민지 쟁탈전을 하던 열강들은 에네켄을 애용했기 때문에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습니다.      


 인력이 부족했던 멕시코는 여러 나라로부터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는데, 특히 조선 사람들을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멕시코 말을 한 마디도 몰랐고, 변변한 영사관조차 없는 약소국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들은 멕시칸 드림을 품고 배에 올랐지만, 정작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강력한 뙤약볕과 살인적인 노동량, 그리고 불같은 채찍 질뿐이었습니다. 김영하 작가의 ‘검은 꽃’이라는 소설에는 당시 대한의 민초들이 받았던 비극적 삶이 절절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노동자가 채찍 세례를 받았다. 채찍 문화가 전혀 없던 조선인들에게 그것은 굴욕이기 이전에 놀라움이었다. 짐승들에게나 휘두르는 채찍을 사람에게 휘두를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라 잃은 백성, 국권 잃은 그들이 받았던 삶은 비참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 성경 역대하 36장에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성경은 무너져가는 예루살렘의 비참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그들을 다 넘기시매 그가 와서 그들의 성전에서 칼로 청년들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병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역대하 36장 17절)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바벨론 제국의 칼날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륙했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긍휼히 넘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형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남 유다의 왕 시드기야는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성경은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열왕기 하25장 7절)     


 끝까지 도망치다 붙잡힌 시드기야는 자신의 두 눈으로 자녀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한 명, 한 명이 목이 떨어져 나갈 때마다 시드기야는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두 눈알이 뽑힌 채, 놋 사슬에 묶여 머나먼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깊은 지하 감옥에 떨어져 죽어가던 자녀들의 모습에 시달리다 죽어갔습니다. 어떻게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이토록 잔인한 형벌을 내리셨을까, 궁금증이 생기게 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남 유다와 시드기야가 그런 받은 심판을 받은 까닭이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계속된 하나님의 구애에도 귀를 막았고,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못했고, 뜻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하나님 야훼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야훼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그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으나 그가 왕을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역대하 36장 12~13)     


 본래 시드기야의 이름은 맛디디야 였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2차 침공 때 그를 왕으로 세우며 무척 성경적인 이름인 시드기야로 이름을 개명해 주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숙부 맛다니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열왕기 하 24장 17절)       


 당시 바벨론 왕은 자신의 나라로 끌려왔던 포로, 다니엘을 통해 야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뜨겁게 하나님을 경외했던 청녀 다니엘을 통해 깊지는 않더라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지요. 그는 맛디디야의 이름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라는 뜻이 담긴 시드기야로 고쳐주며, 그 이름에 대고 충성을 맹세시켰습니다. 그리하면, 시드기야가 말을 잘 들을 줄 알았지요. 하지만 이방 신도 두려워했던 야훼의 이름을 정작 시드기야는 가볍게 여겼고, 결국 바벨론 왕과의 맹세도 깨트려 버렸습니다. 


 시드기야는 재위 초부터 당시 유명했던 선지자, 예레미야를 불러 기도를 부탁하고 하나님의 예언을 듣기도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는 못했습니다. 현실과 말씀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끝내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고, 타협했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보다 눈앞의 현실을 더 무겁게 여겼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딱딱하게 했던 시드기야는 스스로 멸망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너져가는 남유다와 스드기야에게 끝까지 사랑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그들을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완고함이, 딱딱한 마음이 그들을 멸망하는 길로 이끌었습니다. 혹시 나의 마음에는 그런 완고함이 없는지 돌아봅니다.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남들의 눈을 의식하는 마음 때문에,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을 저버리지 않았나,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야훼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역대하 36장 21절)


 하나님께서는 완고한 남유다를 징계 하셨지만,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70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되리라는 약속을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바라셨던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켜 회복되길 바라셨습니다. 그토록 타락하고 변질된 이스라엘이랄지라도 다시 회복되어 주님과 사랑을 나누길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누구보다 깊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 남자아이답지 않게 인형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동물 모양 인형들을 좋아했는데요, 그중에도 특히 아끼던 토끼 인형이 있었습니다. 하도 안고 다니고, 들고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다 헤어져 너덜너덜했습니다. 한 번은 인형 한쪽 팔이 북 찢어졌는데, “엄마, 우리 토끼 아파요. 고쳐 주세요.” 하며 문고리를 잡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한 번은 산책길에서 비슷한 일을 당했습니다.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산길을 가는데 큰 애가 갑자기 기절할 듯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대성통곡을 하는데 알아듣질 못하겠더라고요.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왜 울어? 무슨 일이야?” 하고 물어도 울먹이며 대답을 못했습니다.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어보니, “하마, 하마!” 하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엔 뭔 벌레에 물렸나, 아니면 유모차에 다리가 꺾였나, 걱정을 하다 불현듯 뭔가 떠올라 가던 길을 돌아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길바닥에 인형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부전자전이라고 저희 큰 아이도 저를 닮아 인형을 좋아하는데, 그중에도 아기 하마 인형을 무척 아끼고 거의 사랑합니다. 어느 날은 더럽다고 목욕할 때 데리고 들어가더라고요. 그런데 그 아끼고 사랑하는 아기 하마를 산책시키겠다고 데려왔다 그만 길에 떨어트린 것입니다. 크기가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커서 멀리 서는 눈에도 잘 안 띠는데 산길에 경사가 급해 놀다 떨어뜨린 것 같습니다. 떼도 많이 타고 더러운 인형을, 그걸 잃어버렸다고 그렇게 울며불며 애를 태웠던 것입니다. 얼른 주워주니 언제 울었냐며 곧 그치곤 인형을 꼭 안아주더라고요. 그 모습이 꼭 어릴 때 제 모습 같아서 웃음이 났습니다.      


 아무리 더럽고 흠이 많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끊어버리지 못하십니다. 우리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주님은 우리를 존재 자체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허물과 죄가 많은 인간을 위해 당신의 하나뿐인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너의 하나님 야훼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스바냐 3장 17절)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완고하고 억센 사람일지라도 마음을 깨트려 주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던 김영하 작가의 소설 검은 꽃은 멕시코로 이주해 간 조선인들이 작업을 했던 에네켄의 다른 이름입니다. 또한 검은 꽃은 이 땅에서는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조선의 민초들은 이를 악물고 힘겨운 인생을 살며 검은 꽃 유토피아를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대부분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실패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삶, 평안한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지만 실패하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영롱한 소망이 있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검은 꽃, 유토피아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들풀과 같이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사랑을 의지해 소망한 삶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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