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감독을 하며 길 잃기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를 떠올리며

by 문학교사 체

80년생, 93년생, 결혼은 했겠지? 아이는 몇이나 될까? 수험번호 30422는 크록스에 발목양말을 신었군. 패션테러리스트. 배부한 트레싱지를 부시럭부시럭 산만해서 눈길이 가는 수험생. 반면 두 시간째 미동도 않고 제도에 열중인 30425, 90년생. 마른 몸매에 짙은 눈썹 아래 무표정이 예민해보인다. 왠지 실력자일 듯.


시험은 3시간에 3교시 총 9시간. 3시간 내도록 계산기를 두드리고 쓱싹쓱싹 그리고 지우면서 도면이 완성된다. 감독관인 나는 대리시험인지 신분증을 확인하고 답지를 잘 걷어오기만 하면 된다. 이런 꿀알바라니. 특성화고에서 근무를 해보니 감독관이라는 알바가 거의 주말마다 있는데 나도 한번 신청해보았다. 감독관실에서 만난 모 교사가 ‘어, 선생님 이런 거 안 하시잖아요?’ 하길래 ‘네, 이제 저도 좀 벌어야죠.’ 웃고 말았다. ‘이거 저녁까지 보통 일이 아니에요.’ 조언을 남긴다. 처음이라 약간의 긴장 상태에서 깔지와 트레이싱지, 문제지, 답지를 배부한다. 시험 종이 울리고 수험생들은 분주해진다. 부정 출발 없이 무사히 트렉을 돌기만 하면 된다. 한숨 돌리고 감독관 자료집을 한번 정독한다. 가방 속에 있는 폰을 꺼내고 싶지만 참는다. 디지털디톡스는 이렇게 실현된다.


종이 넘기는 소리, 선 긋는 소리, 지우개질 소리,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 고요한 소리들이 공간의 정적을 깨워보지만 얕게 가라앉을 뿐 고요와 정적으로 교실은 평온하다. 소음 같은 말들을 듣지 않아서 좋다. 말들을 머릿속에 가두고 이리저리 굴려보며 다듬어도 본다. 뱉어지지 않고 깎이고 둥글리면서, 머릿속에서 입안에서 예뻐지는 말들을 주워담는다.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를 떠올린다. 골목길을 떠올린다. 모퉁이 돌면 짠 하고 나타나는 예기치 않은 풍경에 감탄하는 재미가 있었지. 골목길에 있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일까 지금도 좋아하는 골목길을 떠올린다. 길을 잃을까봐 적당히 긴장하고 모퉁이 돌다 무엇을 만나게 될지 적당히 설레는 그 느낌이 좋았다. 구불구불 이어지고 막히고 돌아가는 골목길을 꽤 걸어 ‘여기’까지 왔네. 사거리 슈퍼마켓을 끼고 오른쪽 골목에서 몇 번째 파란 대문에서 나와 꽤 걸어 몇 동 몇 호 숫자로 간단하게 찾을 수 있는, 편리하고 쾌적한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간다. 키패드 숫자만 누르면 안전한게 들어갈 수 있는 나의 집. 이쯤에서 멈추고 뒤돌아 여기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한번 바라다본다. 나는 여러 번 길을 잃었을 테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또 길이 나타났거나 찾아냈거나 해서 여기까지 걸어왔을 테다.


잃는다는 것에는 사실 전혀 다른 두 의미가 있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물체나 사물은 우리 시야에서, 혹은 지식에서, 혹은 소유에서 사라진다. 우리는 팔찌를 잃고, 친구를 잃고, 열쇠를 잃는다. 그래도 자신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는 여전히 잘 안다. 주변 모든 것이 여전히 낯익지만 딱 그 하나의 항목만, 딱 그 하나의 요소만 없어졌다. 길을 잃을 때는 다르다. 그때는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커진 셈이다.


막내는 열 살 전까지 일부러 길을 잃으러 나갔다 오곤 했다. ‘엄마, 나 길 잃으러 갔다 올게.’ 해서 깜짝 놀랐는데 어김없이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정말 재밌었다고 했다. <길 잃기 안내서>에 빽빽하게 밑줄을 그으며 길을 잃으러 떠나는 막내가 떠올라 미소 짓는다. 지금은 중간고사를 걱정하며 학원을 왔다갔다 하느라 샛길로 빠질 틈이 없다. 학교가 파하고 학원에서 지친 아이를 차에 태우며 슬쩍 물었다. ‘어릴 때 길 잃으러 갔던 거 기억나? 그때 왜 그랬어?’ ‘모험, 재밌잖아.’


이제는 막내도 나도 재미로 길을 잃지는 않는다. 길을 잃지 않으므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적다고 안심하지만 진실로 그것이 안전한 길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삶에서 원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무언가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의 건너편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모르거나, 모르는데도 안다고 생각한다. 사랑, 지혜, 자비, 영감…… 이런 것들은 우리의 자아를 미지의 영역으로 더 확장시키는 일이자 우리를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일인데, 어떻게 우리가 그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펴본 <길 잃기 안내서>의 책방을 덮는데 부제가 눈에 들어온다.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건축사의 길을 걷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들을 감독하며 어떻게 하면 길을 잘 잃을 수 있을지를 찾아 헤맨 시간도 같이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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