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창비청소년문학 대상작 <페인트>. 부모들이 버린 아이들을 정부에서 데려와 키우고(NC센터), 그 아이들은 국가의 아이들(nation's children)이라 불린다. 청소년이 되면 직접 부모를 면접해서 선택하고 선택된 부모는 정부로부터 지원금과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한다는, ‘부모 면접’이라는 소재는 청소년에게는 통쾌함을, 부모들에게는 반성의 기회를 선사한다.
책은 두 시간 정도면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재밌고 ‘쉽다’. 가슴이 턱 막히거나, 숨을 참아가며 몰입을 한다거나, 책장을 덮고 가만 한숨을 쉰다거나, 킥킥 웃음이 나온다거나, 밑줄을 긋기 위해 연필을 찾으러 간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제누301(1월에 태어난, 301번째 국가의 아이)이 그들을 부모로 선택할지 말지를 따라 가면서, 자식을 다그치는 나를 반성하고 우리 아들은 나를 선택해줄까 상상하면서 NC센터를 빠져나오면 된다.
불과 나흘 전, 독서토론모임의 책 <작은 것들의 신>은 열 시간을 읽어도 다 못 읽어낼 정도로 재밌지만 ‘너무 어려웠다’. 인도를 방문한 백인아이 소피몰의 장례식 장면을 시작으로 누가 아이를 죽게 했는지 좇아가는 이야기다. ‘브라만 계급이 예상치 못하게 발자국을 밟아 불결해지지 않게 파라반(불가촉천민)들은 빗자루로 자신들의 발자국을 쓸어서 지우며 뒷걸음질쳤고, 공공도로에서 걸어다니는 게 허락되지 않았고, 상체를 가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고,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고, 말할 때는 상대에게 오염된 숨결이 가지 않도록 손으로 입을 가려야 했던’ 인도 사회의 광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슬픔, 아픔을 만나게 된다.
문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 photo@지인
낯설고 아프다. 인도 작가의, 인도에 대한, 인도를 위한 소설. 내가 <작은 것들의 신>을 읽는 것=인도인이 <소년이 온다>를 읽는, 알아서는 안 될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보고야 만, 당혹스러움. 각인되어버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잊을 수 없어 슬픈, 아픈 잔상들. 1997년 맨부커상은 한 편의 소설밖에 쓰지 않은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을 선택했다. 소설의 무게를 달아 상을 준다면 받고도 남을 작품이다.
파파치의 장례식에서, 맘마치는 콘택트렌즈가 눈동자에서 빠질 정도로 울었다. 암무는 쌍둥이에게 맘마치가 우는 것은 파파치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그에게 익숙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구부정하게 피클 공장 주변을 돌아다니던 것에 익숙했고, 때때로 그에게 구타당하던 일에 익숙했다. 암무는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며, 별 희한한 것들에 다 익숙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76p
침묵이 물을 듬뿍 머금은 스펀지처럼 차 안을 채웠다. 한물간이란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부드러운 것을 잘라버렸다. 태양이 진저리치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빛났다. 가족은 이게 문제였다. 거만한 의사들처럼 정확하게 어디를 건드리면 아픈지 알았다. 103p
<작은 것들의 신>을 읽는 동안 계속 슬펐다. 슬픔을 느끼는 것이 느껴졌다. 느낀다는 것은 기쁠 때보다 슬플 때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인트> 작가가 가까운 도서관에 온다고 해서 일행과 약속을 잡았다. 전날 대충 읽는데 술술 넘어가서 당혹스러웠다. 작가는 서른 전에 책을 읽은 적도 글을 쓴 적도 없다고 했다. 김영하가 여자인 줄 알았다고. 작가로서의 매력보다 솔직하고 겸손하고 자유분방한 태도가 인간적으로 좋았다.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있고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아 좋았다. 비유, 상징, 문체에 연연하지 않는, 청소년이 좋아하는, 청소년이 상처받지 않는,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 <페인트>를 읽고, 맑고 순수한 작가와의 만나면서 나는 <작은 것들의 신>이 주는 슬픔에서 빠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