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 저책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집어 들었는데 단숨에 다 읽고말았다. 작가 김하나와 잘 나가는 잡지 에디터 황선우의 글이 너무 재밌고 여자 둘이 사는 게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일상에 바빠 한동안 잊고 있던 친구 ‘야쉬’가 읽는 내내 떠올랐다.
아주 오래 전 메일함
아주 오래만에 아주 오래전 메일함을 열어본다. 한번씩 클릭클릭-삭제를 하면서 차마 휴지통에 넣을 수 없는 메일들의 주인공‘레몬홍차’. 나의 마지막 동거녀 야쉬다. 아이디 레몬홍차, 상큼한 그녀에게 꼭 어울린다.
야쉬와 나는 20대 후반 2년 가까이 동거했다. 건대역 2번 출구 반지하원룸에서 6개월 같이 살다 햇볕을 쬐고 싶다는 일념으로 2천씩 전세금 4천을 마련해 연남동 다세대연립주택 2층으로 이사를 했다. 방 2개, 거실겸 주방, 욕실이 있는 어엿한 집이었다. 이삿짐 트럭 앞자리에 둘이 같이 실려 2층 집으로 간 날, 햇볕이 반가웠던 우리는 의자를 들고 옥상에 올랐다. 반지하생활의 찌든 때를 뜨거운 볕으로 살균하며, 눈을 감고 눈도 살균해야 한다며(눈에 적외선을 바로 쬐면 안 되는 줄 모르고) 지상으로 올라온 걸 자축했다.
대학 동기이긴 하지만 과가 달라 친하지 않았던 우리는 함께 살면서 너무 잘 맞았다. 생활비를 봉투에 넣어두고 살림에 필요한 물품을 알아서 샀고, 구상한 영화시나리오와 출간될 원고를 서로 모니터 해주었고, 일요일에는 같이 청소를 하고 저녁을 거나하게 차리고,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했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시작한 동거였지만 나는 나와 다른 야쉬가 사는 세상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배웠던 것 같다.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온도와 습도의 기후대와 문화를 품은 다른 나라 같아서,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외국을 여행하는 것처럼 흥미로운 경험을' 주었다. 아, 바게트는 치즈가 들어간 바게트가 더 맛있을 수 있구나. 나팔바지에는 짧은 자켓과 통굽구두를 신어야 하는구나. 영화를 3편이나 연달아 볼 수도 있구나. 우리는 잘 살았고 잘 헤어졌다.
관계, 책임, 의무가 아닌 '호의'
우리가 잠깐 스쳐지나가는 시간 동거를 한데 비해 76년생 김하나와 77년생 황선우는 가족을 이루어 산다. 각자의 고양이 두 마리씩을 합쳐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W2C4의 가족. 전혀 남이었던 두 여자가 가족을 이루는 이야기는 사랑에 빠진 남녀가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는 과정과 다를 게 없지만 훨씬 가볍고 시답잖고 유쾌하다.
‘딸내미랑 같이 사는 친구’는 각자의 부모님께 의무는 없이 호의만 받는 자리다. 내가 어머님이 보내주신 열무김치를 맛있게 먹었다 해서 효도 여행을 기획하거나 집안의 가전제품을 바꿔드려야 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다.“어머니께 맛있다고 전해드려!” 정도가 끝이다. 우리는 각자의 부모님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뵈면 반갑고 베풀어 주시는 호의에 감사한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친구의 부모님께 뭘 해드릴 의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호의. 이게 ‘원래의 마음’이 아닐까? 관습과 가족 관계와 책임과 의무로 짓눌려버리기 이전의, 좋아하는 친구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갖는 친근한 마음, 내 자식과 함께 사는 친구에게 잘 대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이 나라 모든 며느리, 사위, 장인 장모, 시부모 들에게도 원래의 마음은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왜곡 없이 이 원래의 마음만을 그대로 유지한 채, 열무김치와 고기를 넙죽넙죽 받아먹는 우리가 역시 위너인 것 같다. 231~232p
오늘도 당장 독서일기클럽이 있음에도 저녁을 ‘함께’먹자는 시어머니의 요구에 부응해, 부랴부랴 ‘함께’저녁 차리는 시늉이라도 하고 빠져나와야 하는 나는 그녀들이 너무 부럽다. 나는, 이번 생은 글렀으나 수많은 조립식 가족의 탄생을 응원해주고 싶다. 내 아들들은 결혼이냐 아니냐의 이분법에서 자유롭기를. 결혼을 선택하더라도 내 아들들에게 호의가 아닌 의무를 짐지우는 꼰대가 되지 않기를. 그래도 여자와 살아봐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