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행의 이유

<여행의 이유>, 김영하

by 독서일기

부스스스 봄비가 내린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가 눈처럼 내린다. 싸락눈. 허공에서 볼 때는 대지에 쌓일 것만 같은데 그럴 리는 없다. 4월이고 봄비.


오늘 엄마생신.

좋은 하루~

의성가는 길~


동생에게서 온 문자. 엄마 생일이다. 너무 먼 여행을 떠나버려 돌아오지 않는 엄마. 생일 축하해.

내 ‘여행의 이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엄마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 나는 더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꽉 붙들고 있을 만큼 유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혹은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카프카를 만나고 싶어 떠났던 체코 프라하, 카프카는 아주 잠깐밖에 만나지 못했다


일주일씩 보름씩 내가 떠나 있다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다거나 하지 않았다. 전화도 오지 않고 전화를 하지도 않고 오직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집중하는 것,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는 데 온 정신을 쏟는 것, 목적지에서 크게 숨을 고르고 한정된 시간을 온몸으로 누리는 것. 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은, 불쑥불쑥 끼어들어 처리에 급급한 일상의 분주함은 음소거처럼 배제되고, 살아나는 것은 온몸의 감각이다.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의 발현. 그리하여 ‘오직 현재’


언제나 여행을 계획하는 나를 현실에 붙들어매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왜 정착이 주는 평안함을 누리지 못하는가? 내 정신은 왜 늘 떠돌고 불안한가?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 노가다 하는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거창으로 합천으로 떠돌아 다녀서인가. 이 대학에서 저 대학으로 서울로 대구로 이 학교로 저 학교로 20대 이후 내 삶은 어쩌면 떠돌아다니는 생활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또 어딘가 낯선 곳을 찾아 떠나는 나라는 인간. 그런데 알고보면 인간은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1598360646799.jpg 한낮 45도 뜨겁고 아름다운 우즈베키스탄의 히바. 아라비안나이트를 만나면 이런 모습일까?

한동안, 꽤 오랫동안 여행을 하지 않았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여행의 이유>는, 대다수 거기서 거기인 여행기를 상상했던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매력적인 책이었다. 무엇보다 나도 몰랐던 나의 여행에 이유가 있었을 것임을 알려준 것. 여행으로 그 사람이 더 괜찮은 인간이 될 수도 있음을 김영하 스스로 보여준 것. 그리고 여행을 하지 않았다고 느끼던 참에 여행을 등떠밀어 주는 것.


여행은, 누구에게나 이렇지 않을까?



일상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해야 할 일들, 그러나 미뤄두었던 일들이 쌓여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들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통제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에 시달리곤 한다. 조금씩 어떤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생긴다. 욕실에 물이 샌다거나, 보일러가 낡아서 교체해야 한다거나, 옆집이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 너무 시끄러워진다거나 하는 일들. 우리는 뭔가를 하거나, 괴로운 일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2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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