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 앳띤 얼굴에 중절모를 쓰고 이질감 없이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구김이 없어 보인다. 하이라이트 문학 자습서로 문학을 외우기 바빴던 학창시절, 채만식의 소설들은 그나마 재미가 있는 편이었다.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末世)넌 다 지내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군대를 동원함)을 히여서, 우리 조선 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허게 살 태평 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밝은 눈, 모던 발랄한 문체
일제강점기를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이 태평천하 에!’를 연발하는 친일파 지주 윤직원 영감의 태평천하 는 결국 믿던 손자가 사회주의 운동으로 잡혀가면서 망하고 만다. 제목을 ‘태평천하’라고 붙인 그의 작명 센스는 지금 봐도 참신하다. Ready-made 人生은 또 어떤가. 1917년 뒤샹의 충격적인 아이디어였던 ready-made(기성품)의 활용과 1934년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의 탄생이 100년이 다 되어 간다는 게 새삼 놀랍다. 시대를 읽어내는 밝은 눈, 모던 발랄한 문체, 지루할 틈 없는 스토리텔링. 그의 작품들을 나는 꽤 좋아했다.
지난 해까지 중학교에서 가르친 채만식의 단편, <이상한 선생님>도 아이들 눈높이에 꼭 맞아 재밌게 수업했던 기억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우러러보던 일제가 망한 충격에서 빨리도 벗어나 미국에 빌붙는 이상한 선생님의 이야기였다. <미스터 방>도 딱 요맘때 이야기다.
1945년 8월 15일, 역사적인 날. “우랄질! 독립이 배부른가?”라고 하는 신기료장수(신 깁는 걸 업으로 삼는 사람) 방삼복의 좌충우돌 인생기.
한번은 탑골공원의 사리탑을 구경하면서, 얼마나 오랜 것이냐고 S소위가 물었다. 미스터 방은 언젠가, 수천 년 된 것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에, 투사우전드 이얼스라고 대답하였다. 또 한번은, 경회루를 구경하면서 무엇 하던 건물이냐고 물었다. 미스터 방은 서슴지 않고, “킹 드링크 와인 앤드 댄스 앤드 싱, 위드 댄서.”라고 대답하였다.
짧은 영어 몇 마디로 미군 소위의 통역관이 된 방삼복. S소위가 묻는 말에 마음대로 지껄인다. 오래 되면 ‘투사우전드 이얼스’, 경회루는 킹이 와인을 드링크하고 댄스와 싱을 하는 곳. S소위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인사들은 방삼복을 거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부를 축적해 으리으리한 집에 살면서 위세가 높아질대로 높아진 방삼복. 이름대로 복이 三면에서 들어오는 팔자도 하지만 잠깐.
몇 명이나 맞힐까
하여간 그는 미스터 방이 된 뒤로, 술을 먹으면서 양치하는 버릇이 생겼었다. 양치한 물을 처치하려고 휘휘 둘러보다, 일어서서 노대로 성큼성큼 나간다. 노대는 현관 정통 위였었다. 미스터 방이 그 걸쭉한 양칫물을 노대 아래로 아낌없이 좍 배앝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공교롭게도, 마침 그를 찾으러 온 S소위가 현관으로 일단 들어서려다 말고(미스터 방이 노대로 나오는 기척이 들렸기 때문에) 뒤로 서너 걸음 도로 물러나,
"헬로."
부르면서 웃는 얼굴을 쳐드는 순간과 그만 일치가 되었었다.
"에구머니!"
놀라 질겁을 하였으나 이미 배앝아진 양칫물은 퀴퀴한 냄새와 더불어 백절폭포로 내려 쏟혀, 웃으면서 쳐드는 S소위의 얼굴 정통에 가 촤르르.
"유 데블!"
이 기급할 자식이라고, S소위는 주먹질을 하면서 고함을 질렀고. 그 주먹이 쳐든 채 그대로 있다가, 일변 허둥지둥 버선발로 뛰쳐나와 손바닥을 싹싹 비비는 미스터 방의 턱을,
"상놈의 자식!"
하면서 철컥, 어퍼컷으로 한 대 갈겼더라고.
헉! 방삼복이 내뱉은 양칫물이 내 얼굴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은 이 기분 나쁜 느낌은 어쩔거야! 누워서 심심풀이 읽던 나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엔딩 최고! S소위의 마지막 한 마디도 최고 엔딩에 화룡점정을 찍는다. 상놈의 자식!
열혈사제의 통쾌한 엔딩을 미스터 방에서 떠올릴 줄이야드라마 열혈사제 이후 실로 오랜만에 통쾌한 결말이다.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이름을 올린 채만식의 과거가 그를 온전히 좋아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게 사실이지만 군더더기없이 세련된 그의 문체와 풍자만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미스터 방> 전문에서 엔딩 장면을 빼고 아이들에게 줘봐야겠다. 몇 명이나 맞힐까? 엔딩을 맞히는 아이들, 칫솔이라도 선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