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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학교사 체 Jun 24. 2020

<국가>에서 나를 발견하다

플라톤, <국가> 제7권

앞집 식당 건물을 칠하는 페인트공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왜냐고 물으니, 계약서에 사인한 것보다 페인트가 훨씬 많이 들어 일할 맛이 안 난다고 했다. 이미 계약은 했고 실컷 일해봤자 본전밖에 안 되게 생겼다. 건물을 대충 눈으로 둘러봤을 때 계약서에 쓴 정도면 충분히 칠하고 남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어긋나버렸다.     

이런 불평을 듣고 있던 노교수가 말했다. “그러게 학교 다닐 때 수학 공부 열심히 하지.”

페인트공은 농담으로 들었을 수도 있지만 노교수는 진심으로 한 말이다.


팔공산 파계사 입구에 있는, 전망 좋은 파이데이아. 신득렬 교수님과 함께 읽는 행운을 누린다.


오늘은 파이데이아에서 <국가> 제7권을 읽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는 7살부터 18살까지 초중등교육기간 동안 체육교육과 시가교육을 한다. 18살 때 시험으로 통과한 사람은 군대 2년. 20살부터 30살까지 고등교육기간 동안 수학,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을 가르친다. 30세에 시험을 쳐서 선발된 자들을 대상으로 문답법을 가르친다는 것이 이상국가의 교육체계다.  

   

이 교과목은 진리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서 오로지 지성만을 사용하도록 혼에게 강요하는 것이 분명하니 말일세. 419p    


‘이 교과목’은 수학이다. 수학을 ‘오로지 지성만을 사용’하는 학문이라니. 멋지다! <국가> 제7권을 읽으면서 나는 수학을 포기했던 예전의 나를 또한번 안타깝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 제곱은 더 커지는 건데 제곱해서 마이너스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루뜨를 왜 씌우는 것인가? 질문했을 때 수학 선생님은 그냥 외우라고 했고, 나는 그 길로 수학을 포기했다. 수학 선생님 때문에 나는 수포자가 되노라 시위라도 하듯이 수학을 회피하며 살았다. 수학 잘 해봤자 계산이나 잘 하지 라는 오해도 내 안에 있었던 것 같다. ‘오로지 지성만을 사용’한다는 구절을 보면서 나는 수학에 사과라도 하고 싶었다.

   

예전 수년 동안 생활글쓰기를 한 적이 있다. 쓸 거리만 잡으면 쓰기도 쉽고 서로 할 이야기도 많다. 그런데 수년 지나니 허무감이 밀려왔다. 쓸 거리도 없고 그만하면 됐다 싶어 그만 두었다. 글을 쓸 때도 운문보다는 산문이 편했다. 시를 읽기만 하고, 좋아만 하고, 쓰지 못하는 내가 초라하게 여겨졌다. 한동안 나의 화두는 ‘나는 왜 시를 쓰지 못하는가’였다.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나는, 대학시절 한 번은 버스를 타고 학교를 지나쳐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 학교 앞에 내렸다. 종점에 뭐가 있는지 궁금했다. 종점에는 버스들만 있었다. 먹고 살고도 돈이 남을 정도가 되어서는 여행을 다니고, 그럴수록 더 먼 곳을 꿈꾸게 된다. 궁금한 게 많고 궁금한 걸 꼭 해봐야 하는 성격. 성격 유형 검사를 하면 나는 ‘경험형’이다.     


수학을 회피하고, 시를 못 쓰고, 여행을 가서 내 눈으로 봐야 하는 그것들은 모두 일맥상통한다. 지성보다 감각이 먼저라는 것. 이쯤 생각이 미쳤을 때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플라톤은 경험을 미천한 것으로 보았다고. 경험이 전부가 아니다! 사실 나는 이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경험을 넘어서는 사유가 나에게 부족하다는 사실도 내심 인정해오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좋은 게 좋다는 사람보다, 온갖 경험을 다 해보니 이렇더라는 사람보다 이성적이고 예민한 지성이 느껴지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마 내가 그렇게 타고나지 않아 부러운 마음도 있는 것 같다. 새빠지게 일하면서도 일할 맛이 안 나는 오늘의 페인트공처럼 대충 눈대중으로, 대충 짐작으로 흐리멍덩하게 살기보다 수학적 지성으로 정확하게 사고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 물론 플라톤이 다 옳지는 않다. 감각과 지성이 조화를 이루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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