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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학교사 체 Nov 21. 2020

다시 여행을 하게 된다면

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

“아, 여행 가고 싶다!”

“아들, 나도!”

사춘기 아들과 통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여행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강렬한 광고 문구에 세뇌라도 된 듯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고. 번아웃 직전 비행기 티켓팅 셀프처방으로 연명하던 그 시절과 함께 아들이 이만큼이나 컸다. 코로나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1년을 마무리하는 지금쯤 일에 파묻혀 있다 숨쉴 구멍을 찾기 위해 또 비행기 티켓을 기웃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아, 이제 진짜 여행 가고 싶다. 흑흑. 그래도 여행은 못 가고, 당분간은 못 갈 것이고, 책으로나마 여행 기분을 내본다.



리파리는 두 얼굴의 섬이다. 잠깐 왔다 가는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얼굴과 오래 남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얼굴이 있다. 121p


늘 아쉬웠다. 관광보다 여행을 하고 싶은데 하루, 이틀, 일주일, 열흘로는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얼굴밖에 볼 수 없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그 얼굴을 보고 싶은데.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을 받는 순간이 온다면 절대 놓치지 않고 노트에, 기억 속에, 가슴으로 적어두리라. 아, 이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그 얼굴을 보았구나.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쿠터를 타고 질주하는 순간의 달콤한 고독을 나는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123p 


여행에서 잊지 못하는 순간의 기억은 이렇듯 사소하다. 부슬비 내리는 몽마르뜨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짧은 시간의 당혹스러움, 그 순간의 두려움과 뒤범벅된 설렘과 흥분. 옆에 두고 지나친 목적지를 한 시간을 돌고 돌아 결국 만났을 때의 허탈함과 감격스러움. 끌고 지고 무거운 짐을 풀지도 않은 채 밀어넣고는 숙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탐색해보는 홀가분한 오후, 낯선 도시에 일렁이는 낯설고 상쾌한 바람과 공기의 느낌. 차가운 바람에 얼얼해진 귓볼을 달래며 뜨끈하게 알딸딸하게 속을 쓸어내리는 핫와인과 카를교의 겨울 공기.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124p

     

맹장이나 발가락이 된 풍경을 떠올려본다. 스쳐가는 풍경들이 아직은 내 몸 밖에 있다. 어쩌면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지금도 타오르미나의 그리스극장에서는 매년 연극제가 열려 전 세계에서 드라마를 사랑하는 관객들을 불러모은다. 그리스 이외의 지역에서 그리스연극을 거의 원형대로 공연하는 곳은 현재로서는 시칠리아밖에 없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 연극을 이천 년 전 공연된 세팅 그대로 볼 수 있는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153p

     

지중해를 꿈꾸고 신화를 사랑했던 학창 시절이 있었다. 꿈밖에 가진 것이 없었던 열여섯 열일곱의 나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에게해에 가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서 잊고 지내다 한번씩 에게해를 떠올리곤 했는데 내가 꿈꾸던 지중해, 에게해를 내려다보며 그리스 연극을 꼭 한번 보고 싶어진다.

     


시칠리아는 삼각형의 섬이다. 삼각형의 세 변은 각각 유럽과 그리스와 아프리카를 바라보고 있다. 등을 돌린 세 사람이 각각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섬, 그것이 시칠리아다. 229p

     

“선배님, 잘 지내시나요?”

한번씩 안부가 궁금한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어, 자전거 타다가 사고 나서 대수술하고 한달 만에 퇴원했어. 시칠리아에서.”

일본, 노르웨이, 칠레, 미국, 쿠바, 베트남. 어디 안 가본 데가 없는 그 선배는 세계의 어느 나라와도 잘 어울렸다. 그런데 시.칠.리.아.는 왠지 낯설었다. 제국주의, 안락, 휴양의 이미지와 선배는 어울리지 않았다. 유럽과 그리스와 아프리카를 바라보고 있는 섬. 아, 그래서 시칠리아로 갔구나. 나도 시칠리아에 가면 유럽과 그리스와 아프리카를 바라볼 수 있을까.  

     


허겁지겁 메뉴를 결정하려는 우리를 만류하며 그는 우아한 태도로 차가운 물 한잔을 권했다.

부인, 천천히 하시지요. 날이 덥습니다.” (중략)

그후로 오랫동안 아내와 나는 힘든 일을 당하며 낙심할 때마다, 혹은 당황하여 우리 중 누군가가 허둥댈 때마다 그 멋쟁이 사장의 느긋한 대사를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이탈리아어 원어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은 간결하고 산뜻한 표현이 된다. “Señora, prego. Ècaldo.” 우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이 말을 외우고 그럴 때마다 거짓말처럼 다시 인생에 대한 느긋한 태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285p

     

멋쟁이 사장님이 내게도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부인, 천천히 하시지요. 날이 덥습니다.

부인, 천천히 하시지요. 날이 참 좋습니다.

부인, 천천히 하시지요. 날이 춥습니다.


, , 천천히 하지요. 날이 더워서, 날이 참 좋아서, 날이 추워서.

천천히 하지요. 


다시 여행을 가게 되면 그때는 더 천천히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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