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엽, <매일의 제주를 너에게>
한때 독립출판에 빠져 있던 때가 있었다. 서울, 제주의 동네책방들을 찾아다니고 독립출판물들을 사서 모았다. 책 사이즈부터 표지, 내용까지 참신하고 파격적인 게 많았다. 엄격하게 훈련된 작가만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시대에서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게 새롭게 다가왔다. 마침 중학교에 자유학기제가 도입되어 1학년은 시험 부담없이 자유롭게 글을 쓰고 편집할 시간이 있었다. 아이들도 재밌고 나도 재밌는 시간이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작고 예쁜 동네책방들은 거기가 거기였다. 작고 예쁜 게 8할이었다. 책방에 책이 너무 적었다. 독립출판물도 기획과 형식은 새로운데 내용이 부실한 게 너무 많았다. 같은 값에 한강이나 김영하의 책을 보면서 ‘그래 책은 이래야지’ 하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여전히 많은 작가들은 수 년씩 고뇌해 글을 쓰고 많은 편집자들은 몇 달씩 고생해 편집하고 디자인을 하고 있다.
동네책방과 독립출판물이 한창 시들해진 무렵 책방조합원 워크샵이라는 명목으로 동네여자들과 경주엘 가게 되었다. 책방워크샵이니 인증샷 차원에서 책방엘 가야 했다. 낮은 담벼락에 작은 나무 간판만 달랑 있는 누군가의 책방. 안 와도 좋으니 관광지가 아니라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인지 고즈넉한 마을 한복판에 자리해 여느 집들과 같아 보이는, 담장 낮은, 집만한 잔디밭이 평온한, 기와지붕 처마 아래 주홍빛 감들이 햇살에 쪼글쪼글 말라가는 아담한 한옥이다. 집 안이 책방으로 꾸며져 있었다. 독립출판물만 있는 책방. 기대치 않고 보기 시작해 책 속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사고 싶은 책들이 많았다. 상엽 작가의 사진 산문집 <매일의 제주를 너에게>를 펴다 말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이 책이 나에게 어떤 새로운 계기가 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잔잔한 수변을 따라오다 보면, 어느새 바다가 다 가려질 만큼 커다란 풍차가 줄지어 있는 해안도로가 나와, 그곳에서 풍차 사이로 지는 해를 봤으면 해. 33p 신창해안도로
후회의 감정이 마치 환절기 같아.
쉽게 춥다가 다시 덥더니, 어느 사이에 선선해지더라. 66p 환절기
발길 닿는 제주 어느 곳에서, 누군가에게 보내는 엽서 형식의 글과 사진이다. 그 곳에 대해, 그 곳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표현한 글들이 좋았고 사진도 좋았다. 나도 어딘가를 가고, 그 곳에 대해, 그 곳에서 느끼는 것들을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오랜만에 작은 동네책방에서, 기분좋은 독립출판물을 만났다! 대작들 사이에서 독립영화 한 편을 보고 일상의 사소한 감상에 빠지듯, 거장의 책들 사이에서 독립출판물 한 편을 보고 느끼는 설렘도 기분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