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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학교사 체 Jun 10. 2020

골든 아워

이국종, <골든 아워>

1.


-박 교수님,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급해도 외과 의사는 칼을 들기 전에 마취과 의사에게 수술 시작에 대한 동의를 구해야 한다. 환자 상태에 대해 최종 확인을 요구하는 것이자 서로에 대한 예우다. 외과 의사가 동의를 구하고 마취과 의사가 동의하는 순간, 둘은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를 함께 치른다.

-예, 빨리 잡으셔야 할 것 같아요. 환자 상태가 정말 좋지 않습니다.

환자의 복부는 더 부풀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해 있어 돌덩어리 같았다. 흉곽에서 심한 피하기종이 만져졌다. 가슴을 누르면 다발성으로 부서져 나간 갈비뼈들이 어그적거렸다. 배 중앙을 갈랐다. 복벽이 열리기 시작하는 순간 내 머리 위까지 피가 솟구쳐 실드마스크를 적셨다. 극도로 심한 장기 파열에 몸 안의 압력이 최대로 올라간 상태였다. 내 맞은편에서 퍼스트 어시스턴트를 하고 있던 정경원의 눈으로 피가 튀었다. 정경원이 눈을 뜨지 못했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다. 이건 드라마...여야 하는데 드라마가 아니다. 결국 살릴 수 없었던 ‘막장’편 40대 젊은 남자의 사연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나고야 만다. 죽은 자, 살아남은 어린 자녀들, 지금까지도 그 아이들 꿈을 꾼다는 의사, 아이들의 안부가 궁금할 때면 허공에 손을 들어 쓸어보곤 한다는 이 의사, 그럴 때마다 허공이 마치 자신의 인생처럼 서럽고 소슬해 보인다는 의사 이국종.     



2.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8’ 총 800쪽에 이르는 실로 수술실의 난중일기. 1권을 덮으며 앞장을 다시 넘겨보다 ‘정경원에게’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못 봤는데……. 사투의 현장들을 읽으며 같은 공간에서 현장을 보고 있는 듯 느끼던 감동이, 백지에 오로지 ‘정경원에게’라는 글만 적힌 맨 앞장을 보는 순간 온몸에 전기가 통하듯 찌릿하다. 2권에도 맨 앞장은 ‘정경원에게’라고 쓰여 있다.     


-야 인마,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냐.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는 거야.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해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답이 없는 물음 끝에 정경원이 서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한다. 가는 데까지 간다……. 나는 정경원이 서 있는 한 버텨갈 것이다. ‘정경원이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이끌고 나가는 때가 오면’이라는 생각을 나는 결국 버리지 못했다. 그때를 위해서 하는 데까지는 해보아야 한다. 정경원이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는 가야 한다……. 거기가 나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2권 313p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정경원을 붙잡고 있는 의사 이국종. 병원 안에서 온갖 멸시, 수모, 참담함을 겪으면서도 그가 버틸 수 있는 힘은 정경원을 비롯해 사선을 함께 넘는 동료들 때문이었다. 삐까번쩍한 로비와 최신 에스컬레이터가 위용을 자랑하는 외관 이면에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들보다 뒤처지는 엉망진창인 의료 시스템을 맨몸으로 막아서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내느라 사투를 치르는 의사들. <골든아워>의 기록은 한 의사의 영웅담이기보다 돈을 최선의 가치로 좇는, ‘정말 막나가는’ 부끄러운 한국 사회의 민낯이며, 지긋지긋한 그놈의 돈이 없는 또는 돈에 영혼을 팔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몸부림이다. 눈물겹다 못해 처절한 인간들, 나와 동시대에 같은 땅에서 숨쉬고 살아가는 이 인간들에 대한 헌사다.     


3.  


동료애. 같은 일을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상상만으로도 설레고 좋다. ‘몰라요’ 하면 그만인 우리 사회의 썩어빠진 관료들과 온갖 구설에 시달리면서 무력감을 느끼고 힘들어하는 그를 보는 안타까움은 결국 그에 대한 부러움으로 변하고 만다. 1년에 4번 집에 가면서 중환자실 옆에서 살았다는 동료 정경원을 비롯해 10년 이상 그의 곁을 지키는 동료들을 보며 부러움이 일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사람답게 사는 길이지.’ 고생하는 이국종 선생님께 너무 미안하지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에는 이국종 교수의 가족들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흔한 ‘고생한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다. 변변한 무기 하나 없이 전장에 나서는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다. 살면서 그같은 동료를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그같은 동료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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