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시그널을 재밌게 봤다. 스릴 넘치고 무섭고 심장 쫄깃해짐을 만끽하며. 필력, 담력, 상상력, 실험정신, 스케일 모두 대단한 작가, 김은희. 이런 사람이 추천하는 책은 얼마나 재밌을까! 『나를 부르는 숲』은 김은희 작가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서 추천한 책이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 작가’ 빌 브라이슨의 책을 나는 처음으로 접했다.
애팔레치아 트레일을 기록한 책이다. 애팔레치아 트레일은 미국 동부 해안을 따라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세계 최장의 도보길이다. 무려 3,500km. 참고로 백두대간 1,400km, 시베리아횡단열차 9,000km, 만리장성 21,000km. 이 어마어마한 트레일을 나는 왜 여태 몰랐던가? 애팔레치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장소에 대한 호기심이 일렁였다. 트레일이라 해서 올레길, 산티아고 순례길 정도를 상상했는데 이건 숲에서 먹고 자고 걷는 것이다. 바다 한 가운데 섬이 아니라 산 속에 고립된 로빈손 크루소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건 여행기라기보다 등산기가 아닌가? 등산은 등산이지 등산이 언제부터 여행이었단 말인가? 여행 작가라는 말에 속은 건 아닌가 고개를 쳐드는 의구심을 애써 물리친다. 알프스의 싱그러움, 아기자기한 유럽 소도시의 넘치는 여유와 낭만, 오르셰 미술관, 루브르박물관 등 부르기만 해도 교양이 UP 되는 뮤지엄들. 젤라또, 카푸치노와 맛있는 먹거리들. 확실히 여행에 대한 나의 인식은 유럽편향적이다. 그래, 이참에 등산도 여행으로 받아들여야겠어. 당신 등산도 여행기로 기꺼이 받아들여 주겠노라는 나의 아량을 비웃기라도 하듯 빌 브라이슨은 쉴새없이 떠들어대고 쉴 만하면 웃겨 나는 금세 그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첫날에는 등산이 끝날 무렵 자신이 조금 지저분해졌다는 것을 의식한다. 다음 날에는 지저분해졌다는 것이 불쾌해진다. 그 다음 날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 다음 날에는 지저분하지 않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잊어버린다. 187p
그러나 우리가 멍하게 쳐다본 것은 한 마을이었다. 진짜 마을, 우리가 일주일 만에 처음 보는 마을은 북쪽으로 10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명확히 길가 식당의 크고 밝게 여러 색깔로 빛나는 간판과 큰 모텔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아름다우면서도, 그렇게 애간장을 태우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나는 저녁 대기에 실려 우리를 향해 둥둥 떠오는 고기 굽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고 여러분에게 거의 맹세할 수 있다. 188p
“자기야, 이거 정말 웃겨.”
거실 한 구석에 멍하게 앉아 구피들을 감상하는 남편은 듣는 둥 마는 둥이다. 상관없다. ‘자기야’는 습관성 호칭이자 감탄사이며 어차피 혼잣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자기야, 이거 정말 웃겨.” 혼잣말을 했던지 남편이 슬쩍 넘겨다보며 “그렇게 재밌어?” 물어본다.
“산에 가야겠어! 애팔레치아 트레일은 아직 힘들겠고 백두대간을 목표로 한라산이라도 가야겠어!”
그리고 남편의 표정은 기억나질 않는다.
책을 읽으며 기분 좋은 며칠을 보냈다. 씻지도 못하고 누들로 끼니를 떼우며 몸만한 배낭에 텐트까지 짊어지고 하루 20km 이상의 산길을 걷는 ‘여행’에 동행하며 상상의 애팔레치아를 걸었다. 유튜브를 검색해보니 신혼여행으로 트레일을 가기도 하고 혼자, 친구들이랑 꽤 많은 젊은이들이 도전하고 있었다. 꾹꾹 발로 눌러쓴 것만 같은 솔직하고 유쾌한 글도 마음에 들었다. 결국 주인공 빌 브라이슨과 친구는 트레일 완주에 실패한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니?” 내가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응, 돌아가고 싶어”라고 말했다. “나도 그래.” 그래서 우리는 트레일을 떠나기로 결정했고, 우리가 산사람인 것처럼 굴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결코 아니니까 말이다. 379p
여행의 대가인 듯 잘난 척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둘은 1,392km에서 트레일의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산에서 빠져 나와 안락한 집의 품으로 돌아간다. 미완의 여운이 짙게 남는다. 완주하는 성공스토리였다면 여운이 덜 할 수도 있겠다. 『나를 부르는 숲』은 그래서 현재형이다. “자기야, 한라산 가야지.” 남편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숲이 나를 부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