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학교사 체 Aug 23. 2021

 아웃사이더 검사

정명원,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언제부턴가 퇴사하겠다는 책이 넘쳐난다. 한때 나도 그 책들을 탐독하며 퇴사를 기웃거렸다. 박수 칠 때 떠나라고 전날까지 잘 다니던 직장에 똬악 사직서를 던지고 나풀나풀 걸어나와 차에 시동을 건다. 8시부터 5시까지 나를 가둬둔 교문을 쌩하니 가로질러 세상 밖으로 나간다. 퇴사! 상상만으로도 통쾌한 이 느낌은 ‘퇴’사의 거센소리 때문일까. 회사에서 물러난 누군가의 절박함을 사돈의 팔촌의 팔촌의 가십거리 정도로만 여기는, 진짜로는 나와는 관계없음의 증명일 뿐일까. 사실, 퇴사 책 서너 권을 탐독하는 걸로 퇴사의 마음이 누그러진 걸 보면 퇴사할 마음은 없었던 듯하다. 그래도 누군가 퇴사했다고 하면 귀가 쫑긋해진다. 이번 방학에도 두 분이 명퇴를 했는데 50대 초반이다. 속마음은 모르겠으나 다들 부럽고 대단하다며 교무실에서는 한바탕 명퇴한 그들에 대한 부러움으로 술렁였다.


  누군가 퇴사를 말하면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열심히 일할 계획과 애사심을 보이면 일‘중독’자인 양,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시절 인간인 양 삐뚜룸하게 보는 분위기가 있는 듯하다. 깊이 발 담궈 열심히 일해봤자 돌아오는 것도 없는 현실에 대한 회피일지도 모르나 자기가 있는 곳에서 묵묵히 게다가 열심히 일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은 그래서 좋았다. 2천 명밖에 없는 검사라는 특수한 직에 있으나 나같은 직장인과 별다르지 않은 그녀의 내면이 친근했다. 나같은 직장인과 별다르지 않으나 검사로서 만나는 사람과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녀만의 방식이 새로웠다. 성찰이라 이름 붙여도 조금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사람과 사물에 붙이는 그녀의 의미 부여는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고 깊다. 미사여구없이 간결한 문장은 깔끔하고 세련된 세간살이처럼 그녀가 부여한 의미들과 조화를 이루며 유행을 초월하는 멋이 난다.


  살면서 검사를 볼 일이 잘 없으니 도대체 검사는 뭘 먹고 뭘 입고 어떻게 살까, 드라마에서 많이 봐왔던 검사의 모습을 상상하며 읽기 시작해 어느 순간 그녀가 일하는 방식에 나를 대입해보게 된다. 자신이 쓰는 캐비넷, 보자기, 법복, 게시판 어느 것하나 소홀히 지나치지 않는 그녀의 사물 인지 방식에 어느 순간 나도 교무실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내 책상과 캐비넷 속 주요 인물들을 대입해보게 된다. 타인의 이야기가 그저 남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가 되는 지점에서 나는 그와 공감할 수밖에 없다. 외곽주의자, 일명 아웃사이더 검사가 보여주는 풍경들이 잔잔하고 여운 짙은 인생 단막극 같아 재미있게 읽었다. 타인의 희노애락 그중 노와 애를 그와 함께 감내해야 하는 고단함을 견디어 나가는 ‘이끼’에게 응원을 보낸다.(사실 프롤로그에서 나는 이 작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채버렸다!)


  혹시 만약에, 나중에 말이야, 책 같은 걸 쓰게 된다면 필명을 써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어. 내 이름보다도 나 같은 어떤 다른 이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나무나 꽃이나 뭐 그런 것 중에 하나면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식물을 좋아하니까, 아무래도 내 삶이라는 것이 좀 식물성에 가까우니까.
 ‘이끼! 어때?’
 지구과학 사전에는 이끼류에 대해 ‘선태식물의 선류에 속하는 하등식물을 말한다’라고 쓰여 있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등식물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 어딘가 안심이 되는 느낌이야. 나를 이끼류라고 분류하는 것에 누구라도 별다른 이의는 없을 것 같아. 내가 이끼 같은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어쨌거나 주목받는 쪽은 아니었고 어디서나 튀지도 빛나지도 않았지. 가만히 있으면 내가 거기 있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몰랐고 누군가의 큰 기대를 받지도 않았어. 그러나 분명한 건, 놀랍게도 나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는 거야. 바위틈이든 나무 밑동이든, 대한민국의 검찰청이든, 좀 서늘하고 어두운 곳, 나는 거기 있었지. 다른 무엇이 아닌 이끼로서! 언제라도 거기에 있었던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할 수도 있을까. 지난 세월, 내가 나로서, 다름 아닌 이끼로서 거기에 있으려고 했다는 사실이 이제 와서 생각하면 조금은 자랑스러워. 그러니까 이끼로서 존재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 말이야. 그것이 나의 자존감의 핵심이지. 6-7p      
     



   에필로그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의 저자 명원이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검사가 되기 전 그녀의 모습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다. 검사로 살아온 시간 동안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작가가 되기 전 그녀의 모습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다.     

 

#1

“법대 후배 명원이라고 신림동에 혼자 자취하는데 같이 살면 어때? 서로 방 값도 아끼고.”

우린 그렇게 만났다. 대학 시절 얼굴 한 번 본 적 없이, 뚜쟁이의 주선으로 방 값을 아끼기 위해 바로 동거에 들어갔다. 한 사람이 大자로 누우면 한 사람은 一자로 누워야 하는, 지금 아들이 쓰는 방보다 작은 방에서 1년쯤 같이 살았다. 그때 그녀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느라 학원과 방만 오갔고 나는 갓 상경해 직장과 방만 오갔다. 우리는 밤에 잘 때만 만났고 이불을 덮고 천장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언니, 오뎅볶음 먹을래요?”

공용 주방에서 그녀가 밥을 차려준 적이 있다. 아무 살림이 없는데 오뎅을 어떻게 볶았는지 나는 그녀가 사법고시를 준비할 게 아니라 요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기억 속 그녀는 가끔 ‘요리’를 잘 했고 유난히 긴 다리로 비실비실 걸었다. 그해 바로 그녀는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우리는 헤어졌다.      


#2

“명원아!”

“언니~”

“애들이 벌써 이렇게 컸나? 산책 가는 길?”

그녀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강아지 산책시키듯 아이들 산책길에 종종 만나 10초 정도 아는 척하고 헤어진다. 화장기없는 얼굴, 질끈 묶은 숱 많은 머리, 유난히 긴 다리로 비실비실대는 걸음. 군데군데 흰머리말고는 20년이 지나도 똑같다.      


#3

카톡-

“언니 잘 지내시지요? 1.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2. 다정한 외곽주의자 요렇게 최종 후보예요. 소중한 의견 한표 주시면 감사하겠사와용”

“1”

“ㅋㅋ 언니는 1번? 법조인들은 2번을 주로 좋아하네요.”

“노노노노”   

  

법조인들이 보는 신문에 실린 글을 보고 편집자가 책을 내보자고 했다더니 벌써 출간. 2쇄를 찍었단다. 작가가 된 그녀, 대단한 에세이스트가 될 그녀의 미래를 잠깐 상상한다. 그리고 오래오래 검사로, 이끼로 남아주기를.

작가의 이전글 남 탓하는 사람과 거리 두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