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생존기
지난해 8월 부모님을 모시고 유럽 7개국을 여행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영국 여행에서 아버지의 후배분을 만났다.
후배분께서 본의 아니게 백수가 된 나에게 영국으로 오는 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내용은 꽤 실제적이었다.
2년짜리 비자를 줄 수 있다.
일을 할 수 없는 비자이다. 영국에서 살 수 있는 기회와 더불어 무료로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곳도 있으니 잘 생각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돌아온 일상 속 나는 빠르게 적응했다.
일도 다시 시작했다.
이따금씩 떠오르는 영국 삶에 대한 갈망은 두려움으로 대체되었다.
이 나이에 가서 뭘 하자는 거야, 장난해?
영어 배우러 영국까지 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넌 20대가 아니야. 남들 다 결혼하고 애를 낳을 나이에 먼 나라에 가서 뭘 하겠다는 거야? 제정신이 아니구먼.
미쳤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
다 해도, 너는 못해.
두려움은 망설임을 만들고, 망설임은 나를 주저앉게 했다.
수많은 고민 속 아버지는 정 그렇게 고민이 되면 한 달만 다녀오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다.
확실히 2년 일 때 보다 결정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쉬이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담시간에 이 중요한 갈등이 빠질 리 없었다.
3주 정도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이야기했다.
여느 날처럼 영국에 갈 이유가 없다고 했다.
상담 중 일 순간의 정적이 흘렀다.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많은 말들을 음미했다.
잠깐의 음미를 끝내고, 다시 시작된 스승님(상담 선생님)과 대화가 날 무너뜨렸다.
"그거 아세요? 영국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이렇게나 많은데...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 놓아주지 않아요..."
"가고 싶은 이유는 무엇이세요?"
그냥요.
얼마나 울었을까.
터져버린 감정의 응어리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참 울고 있는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주시던 스승님(상담 선생님)이셨다.
참 좋네요. '그냥'이란 말이...
무너졌다.
'그냥'이라는 그 별거 아닌 한 마디에.
평생을 어떠한 합당한 정당한 이유 없이 나를 설득하지 못하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이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질 수 있는 책임이라 여겼다.
부족함과 결핍이 주를 이루던 어린 시절 뭔가를 갖기 위해선 늘 그에 알맞은 합당한 이유를 가져야만 했었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했다.
위안과 동시에 분노했고, 억눌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양가감정에 갇혔다 여기며 스스로를 그저 불쌍하다 여겼다.
8월부터 시작된 7개월을 보낸 고민의 답은 '그냥'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답이 있을 줄.
그런데 저 한마디가 나로 하여금 지금껏 맛볼 수 없던 자유를 주었다.
'그냥'이라는 별거 아닌 그 한마디에 내 인생 속 배경이 한국에서 영국으로 바뀌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내 시야는 템즈 강가를 향하고 있다.
여전히 내 마음속 과거의 내가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 힘들지? 그만하는 게 어때?'하고 속삭인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돌아갈 수도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내게 있음을.
1개월 지내보고 결정해 보면 될 일이다.
백세 시대에 1개월이란 시간 내게 기회를 준다고 뭐 별 큰 일 있겠는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면 될 일이다.
나와 같은 고민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누군가를 위하여 마리아 라이너 릴케의 시로 응원의 메시지를 대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