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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장기체류자의 어느 하루

오늘 왜 이래?

by 나나꽃

여기서 ‘치앙마이 장기체류자’란 치앙마이에서 한 달 이상 머무는 사람을 말한다(내 맘대로).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는 여행 쫌 해본 이들 사이에선 관용어처럼 되어 있을 만큼, 치앙마이엔 장기로 머무는 사람들이 정말 정말 많다. 사실 한 달 정도는 인심 좀 써서 ‘장기’로 쳐줄 뿐 몇 달 살기는 흔하고 1년, 2년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여튼, 3개월 장기체류 예정이며 이제 9일차를 맞은 나는(신참은 아니고, 2015년 치앙마이에서 딱 한 달 머물렀던 적이 있다)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끝내고 빠이에 간다는 한국인 여성에게 중고 살림살이를 구입했다. 치앙마이 여행자들이 와글거리는 인터넷 카페엔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방이 있다. 다들 먹이에 굶주린 독수리들처럼 얼마나 잽싼지, 쓸 만하다 싶은 중고는 올라오자마자 ‘거래 완료’가 된다. 느리기 짝이 없는 나는 잽싼 독수리 뒤에 대기하고 있다가 운 좋게 ‘불발’된 거래를 물었다. 커다란 식빵 크기의 미니 전기밥솥, 샤워 필터, 화장지, 라면 하나, 누룽지 한 봉지, 어린미역, 올리브유, 후추, 간장, 피시 소스. 다 합해 24,000원. 수지맞았다! 아침 10시에 빠이로 출발한다는 판매자의 숙소를 찾아가 한 바구니 챙겨왔다.


하지만 정말 운이 좋았던 걸까?

오후에 필터를 교체하려니 필터 사이즈가 안 맞는다. 길이는 짧고 필터봉 한쪽 끝은 샤워기 헤드에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가는 쪽으로 집어넣고 샤워기를 끼워봤다가 필터 끝 플라스틱 부분만 호스 입구에 콕 박혀 빼낼 수 없게 되었다. 아예 샤워기를 쓸 수 없는 상황. 망했다!

그 다양한 물품들 중에서 내가 가장 필요했던 게 샤워기 필터인데... 필터를 끼워도 흰 필터가 하루 만에 갈색으로 변하는 정도의 수질(혹시 모든 나라가 다 그런 건 아닐까). 내가 가져온 것으론 어림도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샤워기 헤드를 주었어야 했고, 나는 내가 쓰는 샤워기 헤드에 필터가 잘 맞을지 꼼꼼히 살펴봤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필터가 모든 샤워기에 맞을 거라고 믿고 있었고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


거래 시 이용했던 카톡으로 연락해 다음 주 금요일에 헤드를 받기로 했다. 빠이에서 다시 치앙마이로 와 아웃할 예정인 것 같았다. 그녀가 나보다 더 당황했기 때문에 좋은 시간 보내고 오라고 해주었다. 하지만 샤워기는 당장 써야 하잖아?

숙소 주인인 아케에게 이메일로 SOS를 쳤다. 아케는 오전 10시에서 12시까지만 근무하고 나머지 모든 사무는 직원들에게 맡기거나 전화로 지시한다(최상의 삶 아닌가, 라고 생각할 사람 많을 듯). 게스트들은 부탁할 일이나 용무가 있을 때 아케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아케는 바로 직원들에게 전달해 해결하도록 하거나 필요하면 본인이 와서 해결한다. 쿨하다고 이름난 뷰도이의 아케.

어쨌든, 그렇게 하여 뷰도이 청소와 함께 게스트들이 소소하게 겪는 문제를 돕는 메이드가 스패너를 가지고 올라와 호스에 박힌 것을 빼주었다. 1초 만에. 자랑스럽게 웃는 그녀에게 뜯지 않은 비타민C 젤리 한 봉지를 주었다. “컵쿤 막막 카~” 진짜 고마워~ 하는 나에게 뭐라고 태국어로 대답하며 순하게 웃는 모습이 왠지 위안이 되었다.


오후와 이른 저녁은 그렇게 지나갔다. 엄청난 사고도 아닌데 기운이 빠지네.

기분 전환에 먹는 것만 한 게 있나. 아케가 알려준 로컬 맛집 중 하나를 골라 길을 나섰다. 거침없이 달리는 오토바이들과 자동차들을 피해 10분쯤 걸어간 그 식당.

“5시에 영업 끝났어요.”

태국어지만 손가락 다섯 개로 금세 눈치 챘다.

“다음에 올게요!”

주인도 한국말을 눈치로 알아듣고 끄덕끄덕 했다.

요상하게도 치앙마이에선 이런 일에 화가 나지는 않는다. 과장 없이, 한 집 건너 하나씩 있는 게 치앙마이 식당. 다른 식당 가면 되지. 하지만 배가 너무나 고팠다. 영업시간을 확인하지 않은 게 잘못이었다.

태국에선 영업시간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음식점이든 카페든 영업시간은 대충 두 시간 대로 나뉜다. 07:00~16:00(혹은 08:00~17:00), 아니면 11:00~21:00(혹은 12:00~22:00). 술을 파는 집은 오후 5시부터 영업 시작. 아침 7시부터 밥을 먹으러 식당엘 가고 그 시간에 커피 마시러 카페엘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서양인들이 여러 테이블을 차지한 식당엘 들어갔다. 며칠 전 타닌시장에 갔다 오다 손님이 제법 많고 분위기도 좋아 보여 한번 와봐야지, 했던 곳이다. 구글맵엔 분명히 비건 식당이라고 돼 있는데 비건은 안 된단다. 그럼 식당 이름에 붙은 '비건'은 빼야지, 이 사람아.

기름기 없이 담백한 게 먹고 싶었는데... 까이양도 안 된다 하여 웬만하면 맛있는 카오쏘이와 코코넛 밀크 스무디를 주문했다. 카오쏘이는 전날 Baan Landai에서 먹은 게 훨씬 훌륭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서양 여성 두 명은 이것저것 푸짐하게 시켜 맛있게 먹고 있었다. 위가 크지 않은 사람이 혼자 식당에 갈 때의 단점, 음식을 다양하게 시킬 수 없다!


* 까이양: 구운 닭고기. 쌀밥과 함께 먹는다.

* 카오쏘이: 코코넛 밀크를 넣은 커리 국물에 달걀면, 닭고기나 돼지고기가 들어가고 바삭바삭 튀긴 면이

고명으로 얹혀 나온다.


슈퍼마켓 Lotus에서 과자와 우유를, 노점에서 튀긴 스넥을 사가지고 집에 왔는데 가방 주머니에 열쇠가 들어 있지 않았다. 열쇠를 들고 나온 기억이 없었지만 10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있기에 내가 오갔던 길을 한 바퀴 돌았다. 어느 곳에도 열쇠는 없었다.

오늘 왜 이래?

또 메이드의 신세를 질 수밖에. 아케에게 이메일을 보내면 다음날 확인할지도 모른다. 건물 1층 메이드 숙소로 가 열쇠 돌리는 시늉을 했더니 단박 알아듣고 나온다. 나 같은 허당들이 많은가 보다. 프런트에서 받은 스페어 열쇠로 무사 귀가. 방에 있던 열쇠가 태연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스페어 열쇠를 돌려주러 가서 “커톳 카~(미안해)” 했더니 “마이 뺀 라이 카~(괜찮아)” 하며 웃는다. 비타민C 젤리 덕분에 조금 덜 미안했다.


태국 과자는 설탕 덩어리처럼 달았다. 고단했던 내 하루도 살살 녹여주렴.


치앙마이 장기체류자의 하루는 이렇게 쉽지 않을 때도 있다. 어디나 사는 건 마찬가지!


* 아케가 그려준 맛집 지도는 너무너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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