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살이. 벌써 한 달이 되었다. 뭘 했지? 서울에 있든 치앙마이에 있든 계획 없이 느슨하게 사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지난 일요일을 오늘 기록하는 게으름 같은 것도. 이래도 되나 싶으면 언제나 같은 변명, 그게 나야!
한국에선 주 5일 지옥철 타고 출퇴근하며 ‘9 to 6’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경건한 마음이 들곤 했다. 치앙마이에선 걷기 좋은 곳들 찾아 새벽 산책을 나가거나, 파인애플 농장 마켓 · 유기농 마켓 등 갖가지 재미난 시장 찾아다니거나, 동행인 구해 당일치기로 시골을 다녀오는 사람들을 보면 그 열정에 기가 눌리곤 한다.
지난 일요일은 나름 소박하게 ‘계획’이란 걸 세워 하루를 채워봤다.
천주교 피정 센터의 미사
하늘까지 타고 오를 수 있을 것처럼 거대한 나무들이 우거진 피정 센터는 환상성과 현실성이 결합된 영화 속 정원 같다. 들어서는 순간 머릿속부터 발가락 끝 모세혈관까지 맑게 세탁되는 순간을 맛볼 수 있다.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소박하게 지어진 성당.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린 십자고상의 예수가 축복을 내려주는 것 같다. 입구 왼쪽의 마리아상은 지금까지 본 마리아상들 중 가장 예쁘고 맑은 표정을 하고 있다.
성당에 영어 미사를 보러 오는 한인들이 상당히 많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미사 후 함께 피정 센터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걸 보면 성당을 중심으로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는 것 같다. 서양인 신부님은 강론 때 음력 새해라고 하며(설날이었다!) 제일 먼저 코리안 피플, 그 다음 차이니즈, 재퍼니즈를 언급하셨다. 그 다음은 대체로 못 알아들었다. 어쨌든 치앙마이 천주교에서 한인들이 제법 탄탄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좋았다. 구글맵의 리뷰를 보면 이 성당에서 2019년부터 월·금 한인미사가 있다고 한다. 대단한걸?
이 특별한 장소는 미사가 끝나도 좀처럼 가고 싶질 않게 만든다. 천천히 한 바퀴 돌고서야 완전한 현실로 돌아가듯 밖으로 나온다. 다음 미사 때는 성당 입구에서 서양 할머니가 나눠주는 커피도 한 잔 달라고 해봐야지.
유니크한 상점 ‘71 EXPORT’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상점이다. 구글맵엔 ‘의류점’으로 등록돼 있는데 그 이상! 작고 재미난 박물관 같다고 할까. 엄청난 높이의 통유리창에 해적이 술통을 밟고 서 있는 외부 조각상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도넛처럼 한가운데가 뻥 뚫린 건물 내부엔 보라색 모형비행기가 공중에 매달려 있고 보트가 허공을 가로지른다. 2층, 3층으로 올라갈수록 더 재밌어진다. 재봉틀 진열장으로 된 유리벽과 자동차 번호판으로 도배된 벽, 엔틱 사진기와 갖가지 골동품, 평상처럼 편안히 앉아 쉴 수 있는 널찍한 검정 가죽 소파..... 구경만 해도 시간이 아깝지 않다.
독특한 디자인의 옷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는데, 봄 가을 겨울 옷들이 대부분이고 남성복이 주를 이루어 당장 골라 살 만한 아이템은 없었다. 귀국할 때 몇 가지 득템해 갈까. 1층 한쪽엔 아주 작은 정원이 보이는 아늑한 카페가 있어 카페라떼 한 잔 하고 가도 좋을 것 같다. 난 갈 길이 바쁘니 이만.....
'꾸어이띠여우 땀릉'의 국수 맛은?
지난주에 허탕쳤던 국수집. 내 입맛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가이드북과 아케가 공통으로 추천한 맛집인데 난 별 세 개 정도밖에 줄 수가 없으니. 한 그릇 가지고는 택도 없는 양이 불만스러워 미각이 깨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 끼 식사에 두 그릇을 시켜보긴 처음이다. 맑은 국수 하나, 비빔국수 하나. 타이 아이스티는 사카린을 넣은 듯 쓰디쓴 단맛. ‘먹어봤다’는 데 의미를 두고 나오는데 주인아저씨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인사하신다. “컵쿤 캅~” 이 집 인기는 주인아저씨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두 손 모으고 인사했다. “컵쿤 카~” 하지만..... 아마 다음엔 오지 않을 거예요.
발품 팔아 집 보러 다니기
처음엔 석 달 중 두 달을 치앙마이에서 살고 나머지 한 달은 치앙라이에서 지내려고 했다.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의욕까지 수그러들고 있다. 아침저녁은 선선하지만 긴 한낮의 태양은 살갗이 쓰라릴 정도로 독하다. 이 짐을 다 이끌고 가야 하는데..... 치앙마이공항 수화물 관리 부실로 손잡이가 뜯겨나간 여행 캐리어를 바꿔야 하는데..... 별별 핑계를 갖다 붙이며 치앙마이에 남아 4박5일쯤 치앙라이에 다녀오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새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게스트가 있고 침대 옆에 커트 코베인이 멋지게 페인팅된 방이 있는 매력적인 숙소는 입구가 잠겨 있었고, 맞은편 일본인 할머니가 한다는 숙소는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로 깨끗하지만 내가 쓸 날짜의 빈 방은 창밖 풍경을 이웃집 지붕이 반쯤 가렸고, 건물 뒤쪽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한 쾌적한 호텔은 월세가 뷰도이의 3배였다.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데 아케가 이메일 답장을 보냈다.
‘너는 한 달 더 연장할 수 있어. :) 좋은 하루 보내.’
밑져야 이메일 작성 10분, 혹시 예약 취소된 방이라도 있을까 하여 이메일을 보냈는데 하루 만에 시원하게 해결이 되었다. 커트코베인이 그려진 방이 아쉽긴 하지만, 방을 구하기 위한 발품팔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커트코베인이 있음 뭐해. 가까운 곳에 시장도 없고 주변에 식당도 많지 않고 아카아마 같은 편안한 카페도 없는데.
예술이 고프다면 치앙마이대학교 아트센터
혀와 위장을 통한 즐거움만큼이나 눈과 귀를 통한 감동이 중요한 것은 특히 이국에서는 진리다. 외국을 옆집 드나들 듯 하지 않는다면 기회는 더 이상 없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자발적 고독을 풍부하게 해줄 만한 것은 아무래도 예술이다.
치앙마이대학교 아트센터는 치앙마이에서 예술을 접하고 싶은 사람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곳 중 하나다. 한 도시의 대표적 미술관이라고 하기엔 시설이 매우 겸손하지만 꽤 넒은 공간에 작품 수가 상당했다.
‘Bualuang Painting Competition’ 수상 작품과 참가 작품들이 드넓은 벽에 걸려 있었고, 불교와 태국 문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Bualuang Painting Competition은 태국 예술가들의 작품활동을 장려하는 대회라고 한다. 태국 불교와 무분별한 개발로 망가지고 있는 치앙마이 올드시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작품들이 많았다.
그저 느낌적 느낌만 가지고 ‘좋다’ ‘별로다’ 하는 수준으로는 작품을 평가한다는 게 우스울 뿐이지만, ‘누가 봐도 괜찮은’ 작품들은 있는 법.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은 그림들이 여러 점 있었다. 정사각형 해자 안, 올드시티가 훼손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상징화한 그림을 '최고'로 꼽아봤다.
오후 3시 반의 햇빛 속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출입구 벤치에 앉아 스니커즈를 먹었다. 태양만 피하면 바람 불어오는 그늘에서 나른하게 졸 수도 있는 좋은 날씨다. 아직 두툼한 후드티를 입고 다니는 현지인들을 보면 얼마 전 한파주의보가 내렸다는 믿지 못할 뉴스가 사실이었던 것 같다.
도심 속 오아시스 ‘SLOP MOTION’
출국 전 어느 유튜버가 자전거를 타고 되는 대로 치앙마이를 돌아다니는 영상을 보았다. 그때 그 유튜버가 “어? 이런 데가 있었네?” 하고 들어갔던 곳이다. 치앙마이대학교 후문 쪽 랑머 지역 주택가에 있는 카페였다. 주문을 하는 단층 작은 건물은 보잘것없으나, 구불구불 키 튼 나무들이 휴식을 주는 넓은 잔디마당에 단박 무장해제되었다.
드문드문 놓인 테이블에서 조용히 대화하고 스터디하는 학생들이 오아시스를 구성하는 일부인 것처럼 보기 좋았다. 자극적이지 않은 음악까지. 그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긴 도보의 피로가 풀렸다. 치앙마이대학교는 상상초월 넓어 정문과 후문이 서로 다른 지역에 있다.
일요일 오후 라이브 공연을 기대하고 왔는데 이날은 공연이 없었다. 또 올 수 있을까? 그런데 ‘SLOPE MOTION’은 무슨 뜻으로 지은 이름일까.
랑머의 길고 긴 노상 음식점들
워낙 유명한 곳인데 이제야 와봤군. 해가 지면서 치앙마이대학교 담장을 따라 수백 미터 이어지는 노상 음식점들은 장관이었다. 워낙 밖에서 사먹는 게 일인 현지인들이 바글바글했고, 백 가지는 넘을 듯한 먹거리들에 눈이 팔려 사진을 찍고 사서 먹어보는 여행자들도 보였다.
갑자기 먹을 걸 고르는 데 결정장애가 있는 나는 인터넷 검색으로 미리 골라두었던 집 ‘까프라오 느아느아’를 찾았다. 인터넷은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지..... 태국어로 주문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한 학생이 눈치 빠르게 내 주문서를 작성해주면서 영어로 설명까지 덧붙여주었다. 주문서를 내고 기다리면 내 차례에 주인이 그 메뉴를 가지고 테이블로 안내하고 거기 앉아서 먹으면 된다. 물은 셀프 서비스.
내가 먹은 것은 ‘팟까프라오’. 잘게 간 고기를 팍치와 넣어 간장에 볶은 것으로(내가 보기엔 그랬다) 쌀밥과 함께 먹는다.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중 택일, 원하면 달걀프라이 추가. 맛있었다. 하지만 너무 짜서 가장 비싼 쇠고기는 조금 남겨야 했다. 짜고 달고 매운 타이 푸드, 그래도 맛있다.
2023 치앙마이 재즈 & 팝 페스티벌
님만해민, 원님만의 가치를 볼 수 있었던 시간. 별 흥미를 끌지 못했던 님만해민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광장을 꽉 메운 관객들과 그 위 방사형으로 늘어뜨린 반짝이는 전구들, 무대를 찢어놓을 듯 열창을 하는 가수들과 악기 연주자들, 한국의 아이돌 팬들 못지않은 떼창..... 무대 바로 옆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아 뜨거운 열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공연이 끝난 팀들을 만나기 위해 무대 뒤로 몰려가 가수에게 사인을 받고, 함께 셀카를 찍고, 말을 걸고, 꺅꺅 소리지르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아이들은 태국의 사생팬처럼 보이기도 했다. 초딩인지 중딩인지 모를 옆 친구들에게 "저 가수들 치앙마이에서 최고 인기 있는 가수니?" 번역기 돌려 물으니,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들이에요!"라고 번역기 돌려 대답했다.
어느 식당의 MZ세대 주인은 BTS 정국이 최애고 블랙핑크도 최고라며 자기 집 와이파이 패스워드가 ‘ilovekpop’이라고 귀띔했고, 숙소를 구하러 다니다 만난 직원은 묻지도 않았는데 뉴진스를 너무 좋아한다며 한국에 지대한 관심을 표했는데,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국 국민 가수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래, 참 보기 좋다.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니 밤 10가 넘었다. 계획을 하고 그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던,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