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삼아~
그동안 찍었던 사진들 중 태국에서 한국의 위치가 얼마나 부상(?)했는지를 보여주는 컷들을 재미삼아 모아보았다.
7년 전 치앙마이에 왔을 때보다 이곳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상당해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차이니즈? 재퍼니즈? 이렇게 묻는 태국인은 열 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나갈 때나 택시에서 내릴 때 “감사합니다”라는 한국말 인사를 듣는 일은 이제 새로울 게 없고, 의사소통이 안 될 때 국적을 묻지도 않고 번역기를 돌려 한국어가 뜬 휴대폰을 보여주는 일도 심심치 않다. 그만큼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은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한중일 중 한국이 조금씩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느낌도 착각만은 아닌 듯하다.
어느 로컬 식당의 MZ세대 여성 주인들은 식사를 하는 나에게 K-pop 가수들 얘기를 꺼내며 계속 말을 붙이더니(블랙핑크와 BTS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식당 와이파이 패스워드가 ‘ilovekpop’이라고 해 나를 빵 터지게 만들었다. 마지막 한 달 숙소를 알아보러 다니 던 중 한 맨션의 여직원은 방도 보여주기 전에 ‘뉴진스’를 너무나 좋아한다며 나도 모르는 멤버들을 쭉 꿰기도 했다. 물론 나는 K-pop의 'K' 자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치앙마이국립도서관 간판에 한국어가 나란히 적혀 있을 줄이야. 2013년인가, 어느 한국분이 한국 도서 1,500권을 기증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도 그분은 수십 권씩 한국 책과 태국 책을 도서관에 기증해왔다. ‘Korean Book’ 코너의 방명록 첫 장엔 군인아저씨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다.
‘~책~ 돈이 생기면 우선 책을 사라. 옷은 헤이지고 가구는 부서 지지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위대한 것을 품고 있다.’ - 인디언의 명언 中에서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린 것은 있어도, 책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온전히 전해져온다. 행간의 숨은 뜻 같은 건 찾을 필요 없이 명징하게. 먹물 뚝뚝 떨어지는 고급 언어나 세련된 맵시로 홀리는 문장보다 훨씬 믿음직하다.
여튼 간판에 한글 표기까지 하고 이 도서관의 가장 중심이 되는 어린이실에 ‘Korean Book’ 코너가 절반을 차지하도록 배려한 것은 엉뚱하면서도 신선했다. 통 큰 첫 기증자가 나온 이후 한국인 여행자들이 몇 권씩 기증 릴레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국뽕과'는 아니지만 이런 에피소드는 참 좋다.
〈오징어 게임〉의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인형을 길 가다 만났다. 하하. 영화에서만큼은 크지 않고 똘끼도 없어 보이지만, 그냥 ‘영희’ 같은 인형이 꽤 크긴 크다. 가게 문이 닫혀 있어 여기서 어떤 오징어 게임으로 장사를 하는지는 오리무중. 반가웠다, 영희야.
BBQ 집은 우연히 본 것만 해도 세 곳. 매장도 광활하고, 그중 하나는 치앙마이 대표 백화점 MAYA 바로 건너편 노른자 땅에 자리하고 있다(오늘 MAYA에 갔다오면서 보니 정확히는 BBQ가 아니라 '바베큐'다). 어디에 있든 BBQ는 저녁마다 치앙마이 현지인들로 바글거린다.
BTS 굿즈나 BTS 사진이 박힌 생활용품은 대형 쇼핑몰에서부터 동네 선물의 집까지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다. 오픈 펍에서 또는 카페에서 K-pop 노래가 들려오는 건 일상적인 일(여기 명동이야? 아, 삼겹살로 유명한 싼티탐의 한 고깃집 이름이 ‘BBQ 명동’이다) 올드시티에 있는, 공연을 중심으로 한 상당히 깔끔했던 란나 스퀘어 야시장에선 거의 유일한 동양인 관객 네 명을 위해 무대 위 가수들이 한국어로 부르는 K-pop 메들리를 선사하기도 했다. 그 동양인 관객들은 나, 그리고 일주일 일정으로 느닷없이 치앙마이로 쳐들어왔던 내 친구들이었다.
처음엔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케이팝인 줄 몰랐다. 예전에 한 개그우먼이 팝송을 귀에 들리는 대로 ‘아나까나 까나리 까니 키퍼웨이 바리쏘 올라잇!’ 어쩌고 부른 것처럼, 그 가수들도 한국어 가사를 들리는 대로 불렀기 때문에....(내 생각)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노래가 왠지 익숙하지 않아?” “한국어 아니야?” “원더걸스네!” ‘노바디 노바디 원츄!’에서 확실해졌다.
낮기온이 36도에 육박하는 요즘(36도에 일기예보는 ‘약간 흐리고 따뜻함’이란다. 기온이 얼마나 더 올라가야 ‘더움’이라고 하려나) 피서 겸 자주 가는 MAYA 5층 코워킹스페이스 ‘CAMP’에 붙은 경고 스티커다. ‘여기 앉지 마세요.’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나란히 붙은 좌석은 하나 건너 하나씩 이 스티커가 붙었다. 태국어와 영어, 한국어가 쓰여 있다. 업무와 휴가를 동시에, ‘웨케이션’을 즐길 줄 아는 건 한중일 중 한국인이다 이거지? 기분 나는데 막 갖다붙이자.
동네에 새로 생긴 코인 셀프 세탁소다. “우린 LG 세탁기 씁니다!” 자랑하듯 LG 로고를 세탁기만 한 크기로 붙여놓았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겠지만 치앙마이에서 엘지나 삼성 로고를 보는 건 새롭지 않다. 조금 과장해, 거리에서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게 LG 에어컨 실외기다. MAYA 3층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매장은 삼성 휴대폰 매장이다. 한국의 대기업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 편이지만 SONY가 눈에 띄는 것보단 백 번 낫다.
치앙마이대학교 후문 쪽에 있는 ‘코리안 스타일 독서실’. ‘독서실’이라고 써놓은 한글을 알아보는 태국 학생은 몇이나 될까. 하긴, CAMP의 알바생도 나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나 한국어 배워요.” 나는 “나 한국인이야”라고 하지 않았다.ㅎㅎ “발음 정확하다” 칭찬했더니 웃음으로 춤을 춘다. 독서실 간판에 ‘EARLY BIRD’를 넣으라고 한 사람은 한국인일 거라는 데 20밧 건다.
내 방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이는 한식집. 치앙마이에 한국식당은 꽤 많은데, 이 식당은 한국인이 아닌 태국인이 한다고 들었다. 내 키만 한 커다란 태극기가 매일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펄럭인다. 치앙마이에 태극기부대가 있을 줄이야.ㅎㅎ 태극기 맞은편엔 남산타워가 우뚝 서 있다. 식당 안엔 한국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다.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귀국하기 전에 한 번 가서 먹어줘야지.
한 달쯤 되었나? 나의 단골, 동네 슈퍼마켓 로터스에도 김치 등장! 구미에 있었다는 나나정글 코리안 푸드 사장님에게서 김치를 사온 이후 발견했다. 비비고 김치 위의 ‘MR. KIMCHI’는 태국산인 것 같은데.... 갓 쓰고 도포 입은 아저씨, 요런 귀여움을 잘 만들어내는 건 태국인들이니까. 집에서 라면 끓여 먹는 날 하나 사드릴게요.
규모가 좀 큰 슈퍼마켓엔 한국 브랜드의 식품이 넘친다. 거의 모든 브랜드의 라면이 압도적으로 매대를 차지하고 있고(일본 라면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김치, 고추장, 된장, 각종 양념, 떡볶이, 만두, 아이스크림, 음료, 맥주, 소주, 막걸리, 각종 과자류, 샤인머스켓……. 한국 드라마의 파워를 슈퍼마켓에서 실감한다. 적극적으로 사진을 찍는 편이 아니라 내 휴대폰 앨범엔 라면과 아이스크림만 들어 있다.
사진을 많이 찍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찍지는 않는 1인이라, 치앙마이 속의 한국은 절반 정도 담겼을 것이다. 애국심은 빈약하지만 그래도 타국에서 한국이 환영받는다는 느낌은 나쁘지 않다. “태국 사람들 한국인 좋아해요”라는 말을 몇 번 들었더라? 택시 안에서, 식당에서, 상점에서 느닷없는 고백(?)처럼 들은 말이었다. ‘고마워요, 별 일 없음 계속 좋아해주세요’ 마음속 말은 하지 않고 “나도 치앙마이가 좋아요” 최대한 귀엽게 웃으며 대꾸해주었다. 그래, 서로 좋아하면서 잘 지내보자규~
그런데 치앙마이 속의 한국을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는 약간의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