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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꽃 Mar 04. 2024

안단테로 걸을 때 줌인되는 것, ‘美’

우리 동네 빼고 아마도 가장 많이 걸었을 도심의 오솔길, 안국동의 작은 길들을 또 걷는다. 정독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할 일이 있지만, 이 동네를 걷는다는 부수적 즐거움이 원래 목적인 듯 놀러온 기분으로 랄랄라. 구불구불, 예쁘게, 소박하게, 품위 있게 이어지고 갈라지는 안국동의 길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거침없이 치솟은 건물 없이 낮은 집들이 오밀조밀 어깨를 맞댄 안국동은 매번 친근하고 편안하다.      


지하철 안국역에서부터 시작된 내 걸음은 안단테, ‘천천히’의 속도다. 나의 걷기는 언제나 ‘이동’ 혹은 ‘운동’이 아니라 ‘산책’이다. 일상의 먼지 낀 마음을 씻어내는 의식으로서의 산책. 단지 걷는 것만으로 내 안에 쌓인 스트레스의 상당 부분이 발뒤꿈치로 빠져나간다. 걸으면서 열리는 세상에 집중하는 사이 일어나는 마법 같은 일이랄까. 아직 봄이 오기 전이지만 안국동의 골목은 어김없이 다정한 얼굴이다. 안녕, 안국동.     


오늘의 산책엔 눈[目]이 더 센서티브해진다. 여러 번 다녔던 골목이지만 새로운 것들을 숨은 그림처럼 찾아낸다. 예쁜 것, 아름다운 것, 완소의 느낌인 것. 인간의 오감 중 정서적 쾌락에 가장 즉각적으로 공헌하는 것은 시각이 아닐까.      


감각적인 외관의 옷가게, 2층의 절반을 차지하는 통유리 진열장 속 매혹적인 여성(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마네킹이다), 골목에 면한 이층집의 귀티 나게 꾸민 작은 현관, 붉은 벽돌 벽에 엉뚱하게 걸려 있는 접시 모양의 도자기 아트……. 예쁜 것들이 하나씩 나타날 때마다 마음속 미운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 같다. 남달리 심미적인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름다움에 환하게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확신하건데, 안국동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이 평화로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마이카를 타고 공들여 꾸민 실내를 나만의 아늑한 세계로 느끼며 아스팔트를 달리는 것과, 캔버스화를 신고 골목 골목 걸으며 숨은그림들을 찾아 눈에 담고 카메라에 담는 것. 백 번 물어봐도 나는 후자에 하트를 날릴 것이다.   



주의할 것은 시각의 둔화와 무감함이다. 이런 곳에서의 무심함, 무감각은 너무나 큰 실수 같은 것. 최고의 미술관에 걸린 명작과는 또 다른 감탄스런 작품들이 그것을 알아볼 예민한 눈들을 기다리고 있다. 절대 허접해 보이지 않는 벽화와 구조물이 100년도 넘었을 칙칙한 담벼락을 특별한 포인트로 만들고, 작은 갤러리의 창문들이 그 자체로 액자가 되어 창 안의 작품들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옛날엔 꽤 잘사는 집을 접근 금지로 만들었을 녹슨 쇠창살은 나름 레트로 감성을 자아낸다.    


 


그리고 아꼈다가 마지막으로 공개하는 것! 정말 아무도 모르고 있을 것만 같은 감탄스런 풍경과 완소 장소를 발견했다. 경사진 길을 오르다 무심히 고개를 들었을 때 허름한 단층집 지붕과 이층집 벽 사이, 저 너머로 경복궁 안 국립민속박물관의 청록색 층층이 기와지붕이 ‘나 좀 봐봐’ 하듯 고개를 빼고 있다. 아니, 발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빼고 건너다보는 것은 나 아닌가? 아트선재센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왼쪽으로 슬쩍 떨어져 있는, 입구도 잘 보이지 않는 한옥 전시실 그 안쪽의 뜰은 진짜 최고다. 나만의 비밀스런 공간으로 ‘찜’ 해놓고 싶은 간결하고 고상하고 고즈넉한 정원. 한옥 전시실 밖 쪽마루에 앉아 고요 속 ‘정원멍’을 하는 시간이 값지다. 아, 좋다!     


  


토요일 열람실 마감 시간이 얼마 안 남아 도서관으로 향한다.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美’한 것들에 ‘美’해진 마음으로 책 두 권을 들고 돌아가는 오늘은 그것으로 200퍼센트 충분하다. 걷는 게 제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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