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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꽃 Mar 22. 2024

‘슈가숲’에 슈가는 조금밖에 없어도

가끔 즉흥적으로 어떤 일을 할 때가 있다. 인터넷 바다에서 헤엄을 치다가 ‘이 영화 재밌겠다’ 하고 그날 혹은 다음날 영화를 보러 간다거나, 소비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닌데 ‘나 저거에 꽂혔어’ 충동구매를 한다거나, 갑자기 집 안의 작은 가구들의 위치를 바꾸고 대청소를 한다거나…….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느닷없이 생각난 어느 장소에 가보는 것도 나의 즉흥성이 발동할 때이다.     


인터넷으로 지도를 찾아보다 한 지명이 도드라지게 내 눈에 들어왔다. ‘슈가숲.’ 설탕 숲이라니, 이런 숲이 있었어? 너무나 예쁘잖아. 실제 설탕은 기피하면서도 ‘슈가’라는 말엔 왜 끌리는지 생각할 시간도 없이 슈가숲의 위치와 주변을 살펴보았다. 도봉산, 그리 깊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슈가숲. 포털 사이트에서 블로그 글을 검색하고서야 슈가숲의 ‘슈가’는 ‘sugar’가 아니라 BTS의 멤버 슈가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도봉산에 방탄소년단 민윤기의 숲이 있었다고?      


아미들 정말 대단하다. 지난 3월 9일 슈가의 생일을 맞아 슈가 서포터즈들이 서울환경연합, 국립공원공단과 협업해 최초로 국립공원 내 ‘스타 숲’을 조성했단다.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 증진에 보탬이 되고 지구의 미래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고. 한때 특별한 이유로 BTS에 빠져 덕질을 하루 3~4시간씩 했던 경력(?)도 있고, 지금도 팬 의식이 조금은 남아 있기에 물, 커피, 과자 등등을 가방에 챙겼다. 집에서 멀지도 않은데 안 갈 이유는 없지.     


그리고 숲까지 걸어가는 길, 얼마나 좋겠어.     


슈가숲은 기대했던 숲은 아니었다. 도봉산 입구에서 오솔길을 따라 30분쯤 숲 내음 맡으며 걸어 들어가는 걸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가까웠고, 가까운데 안내 표시가 전혀 안 돼 있어 둘레길을 백 미터가량 걸어갔다 돌아 나오는 좋은(?) 시간도 가졌다. 구글맵에 없는 접근 경로를 북한산생태탐방원 직원이 안내하며 직접 그곳까지 동행해주었다(산은 도봉산인데 북한산국립공원 표지석과 북한산생태탐방원이 그곳이 있는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 직원, 아이유 팬 ‘유앤아’인데 BTS도 좋아한다며 사진도 찍어주고 나보다 더 신이 났다. 서울의 북쪽 가장자리 도봉산까지 슈가숲을 찾아오는 외국인들도 많다는데, 슈가숲이 만들어지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출동하는 아미들, 막강 군대 ‘인정’이다.  

생태탐방원 뒤편에 조성된 정말 작은 슈가숲. 슈가의 곡을 큐알 코드로 붙인 나무벤치 세 개와 피아노 건반 느낌으로 둥글게 이어진 직사각형 바닥돌이 슈가 흔적의 전부인 것엔 실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숲길이 이어지지 않은 막다른 공간은 많이 아쉬웠다. 차라리 진짜 숲속에 나무벤치 하나 놓고 슈가의 음악을 계속 틀어놓는 게 낫지 않았을까. 어쨌든 벤치에 앉아 큐알 코드로 정제하지 않은 흑설탕 맛 같은 슈가 랩을 들으며 커피 마시는 시간을 느긋이 갖고 본격적인 산책을 시작했다.     


슈가숲에서의 아쉬움은 집까지 쭈욱 걸어오는 것으로 충분히 해소되었다. 슈가숲 근처의 절에 들러 오랜만에 오색찬란한 사찰 감상을 한 후,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전혀 모르는 길로 걸었다. 너무 오래 신어서 몇 군데 접착 부분이 떨어진 내 경량 슈즈는 긴 거리를 걸을 때 최고다. 몇 시간을 조금의 피로감도 없이 마지막 한 걸음까지 탄력이 붙게 하니까. 많이 걷고 싶은가? 세상 편한 신발부터 준비하라. 발에는 30억 개의 모세혈관이 모여 있고 이것은 인체 모세혈관의 60퍼센트에 해당한다고 한다. 발을 편하게 하지 않으면 온몸이 피곤하고 몸살이 올 수도 있다. 대충은 다 알 만한 TMI는 이 정도로.     


도봉산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거기서부터 슈가숲까지 걸어갔던 시간보다, 슈가숲에서 집까지 걸어간 시간이 2.5배는 좋았다. 많이 걸을 수 있어서, 처음 가보는 길의 아파트숲 아닌 집들이 햇빛 속에 포근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을 수 있어서, 어느새 돋아나기 시작한 초록이 길가에 물속에 나무에 봄의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하고 있어서. 어머나, 개울에 웬 두루미? 이런 녀석들도 볼 수 있어서. 휴대폰 배터리가 아웃돼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두 눈에 가득 담았다.     


왕복 총 세 시간의 걷기였으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고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슈가숲에서 슈가는 조금밖에 못 느꼈지만 섭섭하지도 않았다. 슈가숲은 나에게 모공을 활짝 열고 새로운 공기를 흡수하며 두 발의 소박하고 즐거운 모험을 하게 했으니까. 물론 마음속에 쌓인 일상의 피로와 감정의 찌꺼기도 많이 빠져나갔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어.      


걷는다는 것은 정말 순수하게 온전히 내 몸이 되어 세상과 교감하는 것이다. 우리의 먼 먼 조상 네안데르탈인 때부터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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