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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꽃 Jun 23. 2024

골목의 정서를 밀어내버리지 말라

채소 모종을 사러 종로5가에 갔던 어느 날. 인도와 차도의 경계를 따라 이어진 꽃시장에 한눈을 팔며 분주히 눈동자를 굴리다 모종 몇 개를 사고는 발길을 지하철역 쪽이 아닌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곳에 갈 때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는데, 결국 꽃시장 저 끝을 향해 햇빛이 하늘거리며 내려앉는 길을 걷게 되었다.     


꽃시장 노점이 끝나고 다섯 갈래 길의 로터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로 가볼까. 꽃시장과 대척점의 허공을 가리키며 노점 사장님에게 물었다.

“저 너머로 가면 어디가 나오나요?”

“대학로죠. 저기 횡단보도 건너서 왼쪽으로 가다가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편하게 빨리 갈 수 있어요.”

“아하, 감사합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청개구리가 튀듯이 오른쪽 길로 방향을 잡았다. 편하고 빠른 길보다 약간 경사진 언덕을 올라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서울을 어지간히 돌아다녀본 몸이시라, 빠르고 편한 길로 가면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지 금세 파악이 되었다. 그러니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중요한 것은 ‘내가 가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내가 걷고 싶은 길’. 나는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장악한 채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길과 공간들에 내 감각을 확장시키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짧은 언덕길 위에서 나는 가로로 이어지는 6차선 도로를 만났다. 율곡로. 옛 느낌의 고품격 길 이름에 걸맞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기품이 우러나는 동네를 거느린 길이었다. 훤칠한 높이의 가로수들이 지키고 선 언덕마을 입구의 오래된 가게들은 절대 누추해 보이지 않겠다는 듯 단정하고 때론 센스가 엿보이기도 했다. 상호 ‘원일미싱’ 위에 똑딱이단추 모양의 철제 조형물 두 개를 똑 똑 올려붙인 귀여움 같은 것. 그 마을 사람들이 가진 삶의 속살은 알 수 없지만, 똑같이 굳은 표정의 아파트 단지보다 포근한 정서를 주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대학로를 향해 그런 느낌이 계속되는 율곡로 중간, 낙산공원 일대에서 가장 근사한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스팟으로 올라가는 율곡로19길을 발견하기도 했다. 와우.  

   

비닐백에 든 모종 때문에 그만 귀가하려던 나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화사거리에서 홍대아트센터 쪽으로 길을 건너 혜화역으로 가던 중이었다. 오래된 주택들이 보이는 작은 골목의 유혹은 뿌리치기가 힘들다. 후회할 걱정이 없는 끌림. 그곳엔 반드시 지루함과 뻔함을 깨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내 보행의 순간들을 새롭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꿔줄 무엇.     


역시나. 햇빛이 다양한 조각들로 내려앉은 골목은 카메라를 갖다 댈 수밖에 없는 그림들이 눈을 돌리는 곳마다 대기하고 있었다. 레트로한 파란색 대문에 걸린 편지함에 각종 우편물과 홍보지가 설렁설렁 꽂혀 있고, 하늘과 구름을 연상시키는 그림의 차고 모서리와 방범용 철제 뾰족펜스 위로 “내가 젤 잘 나가” 꽃을 피운 장미 넝쿨들, 참 특이한 모양인 단층집과 안으로 쑥 들어간 한옥식 대문 그리고 현관 지붕 아래 바구니 달린 자전거, 계단 몇 개 올라가 현관이 있는 집에 층층이 놓인 꽃화분들, 붉은 벽돌 담벼락에 붙은 귀요미 알림 표지들 '막다른 길입니다' '흡연금지' '연건마을 안전 비상벨'. 정말 내 눈엔 보석들이다. 그리고, 부모님도 보고 공부했을 것 같은 각종 자격시험 전문 참고서 문제집의 원조 크라운출판사가 이 정겨운 옛 동네에 있었다니!      

그런데…… 이건 뭐지? 동네 골목들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골목 저 골목 눈에 잘 띄는 곳마다 나붙은 현수막들이 이편과 저편로 나뉘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데 왠지 느껴지는 불길함. 싸움의 주제는 ‘연건동 305 구역 재개발’이었다. 재개발 찬성은 공기업과 대기업(우리나라 대기업은 왜 하나같이 문어발일까), 반대는 주민들로 이루어진 비상대책위원회. 누가 이길지 훤히 내다보이는 싸움이었다.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벌어지는 모든 싸움에서 투쟁을 하는 쪽은 지고, 사업을 하는 쪽은 이긴다. 대부분 ‘자본의 야만이 벌이는 원주민 내쫓기’라고 생각하는 나는 빨갱이? 마음은 야만, 머리는 콘크리트인 분들이여, 도시에 얼마 남지 않은 골목의 귀한 정서를 밀어버리지 마시라. 오직 집값 가치만 있는 상상력 제로의 멍청한 아파트 신축건물에 도시의 생명력을 묻어버리지 마시라.     

나의 행복한 걷기는 주민들의 의사를 짓밟고 토건 만행을 벌이는 SK와 LH공사 때문에 훼손되었다. 나는 감히 만행이라 하고 싶다. 이 만행의 시작엔 언제나 그렇듯 대기업을 위해 개발 제한을 마구 풀어준, 시대착오적 재벌 살찌우기 토건 마인드의 시장이 있었겠지. 내가 좋아하는 서울의 아름다운 시골 무수골이 그 시장의 선거용 선심성 개발제한 해제로 빠르게 망가져가고 있는 것처럼. 도시의 무정하게 뻗어 올라간 콘크리트 건물들과 유리 빌딩들 안쪽에서 아직은 귀하디귀한 풍경이 되고 있는 이 마을이 온전히 지켜지는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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