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나꽃 May 17. 2024

기대치 않은, 두근거리는 모험

새해가 시작될 때 한 후배가 물었다.

“올해 언니 계획은 뭐예요?”

2024년 한 해의 계획보다는 5년 후, 10년 후의 계획에 관심이 집중돼 있었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많이 걷고 싶은 거?”

그때 빈말도 아니고 꼭 지켜야 한다는 다짐도 아닌, 느슨한 약속을 했다.

“날이 따뜻해지면 만나서 걷자.”

그 말을 꼭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4월 끝 무렵 그 후배와 통화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내일 걷자” 했고 다음날 만나 남산 길을 함께 걷게 되었다.     


남산 길을 제안한 것은 나였다. 예전에 꽤 재밌게 보았던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의 일리야가 지인들을 한 명씩 만나 82가지 Q&A를 진행했던 콘텐츠 중 한 영상에서 본 길이었다. 남산에 저런 길이 있었나? 평탄한 숲길을 산책로로 잘 조성한 듯한 그 길을 꼭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단아하고 평화롭고 예쁜 길이었다. 다양한 검색을 통해 그 길이 하얏트호텔 건너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냈다(단, 그것은 확신에 가까운 추측일 뿐 정확히 그 지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마침내 그 길을 걷는구나!     


하얏트 건너편, 소월길 안쪽으로 시원하게 이어지는 산책로를 보자 탄성부터 나왔다. 탁월한 선택이었어. 자동차들이 씽씽 속도를 내며 달리는 차도에서 겨우 30미터쯤 들어왔을까. 하늘에 닿을 듯 키 큰 나무들이 수려하게 늘어선, 아름다운 영화 촬영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니. 한동안 삶의 주도권을 바깥 세상에 빼앗기고 살았던 것처럼, 내 발이 진정한 걷기를 하고 내 마음이 순식간에 자유로워지는 경험. 인스타그램에 올릴 배경을 찾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새롭게 열리는 세계 앞에 일상의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는 여행, 그것이 순수한 걷기의 기쁨 아니던가.     


그러한 감각 속에 우리는 곧 갈래길을 만났고, 어디로 가야 일리야의 영상에서 보았던 그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을지 선택을 해야 했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반반의 확률에서 깊이 고민하는 건 어리석은 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발길은 왼쪽 길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우린 단아하고 평화롭고 예쁜 길이 아닌 등산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걷는 걸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뜻밖에 열린 길에서 느낄 즐거운 기분을 거부하지 않을 거라면. 어차피 이곳은 자동차 소음과 많은 이동 인구에 시달릴 일이 없는, 나무들 가득한 숲속 아닌가. 이런 곳에서 우리 몸은 능동적으로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또 한 번 몇 갈래로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우린 남산 타워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택했다. 그 길은 둘레길이 아니라, 울퉁불퉁 작은 바위들과 나무뿌리와 그것들을 지탱하는 흙길이 꼬불꼬불 이어진 가파른 산길이었다. 숨이 조금 가빴고 땀이 났지만 수런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목덜미를 지나가는 산들바람, 햇빛을 받아 빛나는 초록 잎사귀들의 파노라마에 상쾌하게 감각이 살아났다.      


남산 꼭대기로 이어지는 계단길이나 케이블카를 공식처럼 이용하지 않고 작은 숲속의 길을 한 발 한 발 짚어가는 이 걷기는 길이, 숲이 부르는 소리를 따라가는 모험이 아니고 무엇일까. 조금 천천히 걷기도 하고 나무 아래 잠시 주저앉아 쉬기도 하면서 우린 도란도란, 곧 잊어버려도 아무 문제 없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가려고 했던 길이 아닌 전혀 다른 길에서 그 시간이 주는 두근거림을 안고.

매거진의 이전글 문제는? 욕심의 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