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농장에서 열린 길

by 나나꽃

아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세 여자가 유럽 여행을 했을 때의 일들 중 또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둥글둥글한 성격의 소유자는 한 명도 없고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으로 각기 개성이 다르게 뚜렷하며 누구 하나 너그러움의 미덕도 갖추지 못한 탓에 세 사람은 처음부터 아슬아슬했다. 나는 솔직한 게 탈이라 초반에 두 사람에게 여러 차례 상처를 주거나 그들을 당황하게 했고, 그 둘은 서로 표정 관리를 하며 다른 한 명이 없을 때 나에게만 속내를 털어놓다가 결국 불만이 쌓여 꽝 세게 부딪치는 일이 두 번 발생했다.


MBTI의 E와 I로 설명하자면 두 사람 중 ㅅ은 ㅎ의 지나친 E스러움에 질색했고, ㅎ은 ㅅ이 그런 자신을 질색하고 부끄러워한다는 걸 괘씸해했다. 양쪽이 다 이해되기도 했으나, 볼로냐 아동도서전에 갔을 때 행사장에 입장을 하자마자 ㅅ이 “각자 알아서 돌아다니다가 여기서 만나자”라고 했을 때 나는 잠깐 ㅎ에게 마음이 기울기도 했다. “ㅅ이 도서전에 참가한 출판사의 지인과 만나야 하는데 내가 창피해서 따로 다니자고 한 거다”라는 ㅎ의 말이 억지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오지랖’ 과인 ㅎ에 대해 ㅅ이 신경 쓰인다고 나에게 줄곧 말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자리에서 ㅎ이 폭발해 도서전 구경은 고사하고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관람객들 쉬라고 빈 공간에 둔 등받이 없는 의자 세 개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둘은 격론을 벌이고, 나는 ‘이 말씨름이 언제 끝나나’ 기다리며 잠자코 앉아 있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ㅎ은 ㅅ의 허를 찌르며 신랄했고, ㅅ은 하소연 섞인 방어를 했던 것 같다. 가까스로 언쟁을 끝내고 그야말로 ‘대충’ 도서전을 훑고 나와서는 ㅅ이 비싼 스카프를 잃어버렸다며 혼비백산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ㅎ과 나도 함께 따라 들어가 스카프를 찾아내는 해프닝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두 번째 부딪침은 그라나다의 한 갤러리에 들렀을 때 발생했다. 셋 중 영어 실력이 가장 나은 ㅎ이 전시에 관한 영문 설명을 소리 내 번역하는 걸 ㅅ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우리도 그 정도는 알거든?” 누가 보면 초딩 수준이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그만큼 예민하고 날카로워져 있었을 것이다. 유치함으로 보자면 어른이 아이들 뺨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때도 투닥투닥 주고받던 말들이 얽히면서 ㅅ이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며 갤러리를 나가버리고 두 사람은 따라 나가 ㅅ을 찾느라 갤러리는 발만 걸치고 나온 셈이 되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한 숙소에서 우린 지친 몸과 맘으로 잠자리에 들었고, 셋 다 약속이라도 한 듯 아침 일찍 깨어났다. 산책을 하자. 누구의 제안이었는지 모두 콜, 하고는 숙소를 나섰다. 알함브라의 웅장함 뒤에 이런 풍경이 있었다니. 조용하고 소박한 삶이 느껴지는 동네 작은 골목길엔 부지런한 주부가 널어놓은 빨래가 팔랑이고, 햇살 부서지는 흰 벽의 집들 사이로 고양이가 나른하게 졸고 있으며, 어느 집에선가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정겹게 흘러나오는 곳 그라나다. 시간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왠지 마음이 찡해지는 포근함 속에 언덕길을 올랐다. 그리고 언덕을 넘어 우린 합창하듯 탄성을 질렀다.


우리를 맞아준 것은 넓게 펼쳐진 올리브 농장이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올리브나무 사이로〉를 보며 올리브 나무 사이를 걸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올리브 농장을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 뜻밖의 만남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올리브나무처럼 무성하지도 않고 키가 작은, 아직 열매를 맺기 전 이파리만 매단 올리브나무였지만 아마도 평생 단 한 번 만날 수 있는 풍경이었다. 게다가, 농장 저 너머로 멀리 희끗희끗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광경이라니. 숙소에서 꾸물거리며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나 마시며 남은 감정의 찌꺼기를 걸러내려 애쓰고 있었다면 놓쳐버렸을 귀한 선물이었다.


우리는 올리브나무 사이로 돌아다니며 그라나다의 청량한 아침을 호흡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가식 하나 없이 웃고 놀았다. 자신을 이해시키려 말로 하는 설득이나 해명은 오히려 찜찜한 감정만을 남겼는데, 함께 걸어다니다가 단번에 마음의 길이 열리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이렇게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엄청난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이 좋은 해결의 지점에 이르게 해준다. 그날 우리는 마음껏 개운해져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알람브라 궁전을 구경하고 아랍인 전통 마을 알바이신 구역을 쏘다녔다. 물론 나에겐 세계적 문화유산인 알람브라 궁전보다 올리브 농장이 열 배는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였고 작가이자 비평가였던 레슬리 스티븐은 당대 최고의 사상가들이 참여했던 선데이 트램프스(Sunday Tramps)라는 특별한 걷기 클럽을 창설할 만큼 열렬한 걷기 애호가였다고 한다. 그는 그의 〈걷기 예찬(In Praise of Walking)〉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알프스를 걷는 일은 시적인 성취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멋진 풍경을 볼 때 뭉클하게 어떤 감정이 솟아나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때 우리에겐 그라나다의 언덕 마을을 걷고 올리브 농장을 걸어다녔던 일이 시적인 마음의 성취였을 것이다. 너무나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서로를 수용하는 감정이 솟아났던 것이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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