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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꽃 Jul 28. 2024

지도를 따라 걷기

어제 파리올림픽 개막식이 있었다. TV 뉴스와 인터넷 포털 사이트가 공평치 못하게 올려놓는 언론사 뉴스를 보지 않은 지 오래, 내가 신뢰하는 인터넷 언론사의 보도만 찾아보기에 알고리즘이 갖다놓은 콘텐츠로 알 수 있었다. 파비앙tv가 왜 내 화면에? 가끔 알고리즘은 엉뚱한 짓을 한다. 어쨌든,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다는 프랑스인 파비앙이 파리로 날아가 파리올림픽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나 보다.     


영상을 클릭한 것은 2011년 봄 파리 여행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 느린 발걸음을 길게, 촘촘히 남겼던 파리 여행. 영상의 제목은 ‘파리올림픽 시작! 과연 준비되었을까?’였다. 파비앙이 전하는 파리 소식은 섬세하고 디테일해 재미있었다. 하지만 내 눈이 더듬고 있는 것은 올림픽을 위한 준비 상태나 시설물이 아니라 파리의 풍경이었다. 파리의 대표적인 상점가 리볼리, 그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인 센강, 퐁네프다리, 노트르담성당, 루브르…….     


여행은 셋이 했다. 나, 그리고 내 지인과 그 지인의 친구 한 명. 이탈리아 세 도시를 여행하고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가기 전 파리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취향도 성격도 제각각인 세 사람은 여행할 도시를 정하고 기본 일정을 잡은 뒤, 가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일이 다를 경우 각자 흩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 둘이 함께하고 나 혼자 다닐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그들이 파리 근교 베르사유 궁전을 갈 때 나는 카르티에라탱 지역을 돌아다니는 식이었다.     


내 여행의 목적은 유명 장소를 찾아 그 나라,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것보다, 마음을 끄는 지역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현지인의 삶의 환경과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일단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까지 ‘걸어가다’ 보면 내 몸과 마음에 흡수되는 그 모든 것들이 내 여행을 이룬다. 특히 서울의 6분의 1 크기라는 파리는 도보 여행자에겐 딱 맞는 도시 아닌가.      


2011년에는 스마트폰이 상용화되기 전이라 종이로 된 지도를 들고 다녔다. 사실 멀든 가깝든 길찾기를 구글지도에 의존하며 “구글맵 하나면 오케이야” 하게 된 지도 오래라, 13년 전 여행 상자에서 꺼낸 종이 지도를 보고 핫, 웃음이 나왔다. 파리 가이드북의 지도를 지구별로 크게 확대 복사한 여러 장의 지도는 접은 부분이 많이 해져 작은 구멍들이 나 있다. 볼펜으로 지도에 메모하고 별표나 동그라미 표시를 한 흔적에서 내 발걸음의 지도가 어슴푸레 보이는 것 같다.      


카르티에라탱 지구의 지도에는 소르본대학과 바로 건너편 셀렉트호텔에 별표가 되어 있다. 셀렉트호텔은 시대를 한참 앞서 나갔던 비운의 화가 나혜석이 남편이 아닌 남자 최린과 함께 밤을 보냈던 곳이다. 당시 두 사람의 불륜에 관한 소문이 파리 유학생들 사이에서 떠들썩하게 퍼졌고, 나혜석은 귀국 후 이혼을 당했다. 이후 잡지에 <이혼고백서>를 당당히 발표하며 여성의 성적 해방과 자유를 주장했으나, 그녀는 파리에서 낙인찍힌 주홍글자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이단아로 몰려 사회는 물론 가족들에게까지 외면당하고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 행려병자로 비참한 삶을 마감한다.     


내가 묵을 일 없는 4성급 셀렉트호텔까지 가봤던 이유는 친구의 부탁 때문이었다. 나혜석이 머물렀던 호텔이 어떤 곳인지 구경이라도 해보고 자신에게 얘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혜석에 지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친구였기에, 조금은 엉뚱한 부탁이었지만 오케이 했다.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었다. 목적지는 셀렉트호텔이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에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내 눈길을 붙잡을 것들이 얼마든지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잠깐 옆으로 새서 돌아보아야 할 빼놓을 수 없는 장소들까지. 그리고 가이드북에 실릴 만큼 이름난 곳은 가는 길에 하나씩 나타나게 마련이다.    


숙소에서 셀렉트호텔까지 걸어가는 길에 나에게 다가왔던 파리의 풍경이 종이 지도 위로 그려진다. 넓지 않은 길 양쪽으로 시대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늘어선 근사한 석조 건물들, 그 건물들마다 까만색 레이스를 두른 듯 쭉 이어져 있던 예쁜 철제 난간, 더럽기로 악명 높음에도 벤치에 앉아 시처럼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센강, 화재가 나기 전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소박한 귀족 느낌의 생루이 섬, 동네 작은 서점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셰익스피어인컴퍼니, 12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구획되어 있지만 그 안으로는 가로 세로 사선이 얽힌 오밀조밀한 거리, 야외 테이블들을 놓고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파는 멋쟁이 카페들, 곳곳에 특색 있게 조성된 쾌적한 공원과 광장, 개와 함께 나온 산책자들과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 사람들, 친절하지는 않지만 간결함이 느껴지는 가게 주인들…….     


사실 셀렉트호텔에는 예쁘고 부띠끄한 호텔, 그 이상의 어떤 느낌도 받지 못했다. 팡테옹이나 뤽상부르공원, 기타 내가 지나치거나 들렀던 굿 플레이스들이 가깝다는 것 하나 더 추가? 나혜석도 단순히 호텔이 좋고 위치도 좋아서 셀렉트호텔에 머물지 않았을까. 친구에겐 나혜석이 묵었던 호텔이 어떠했다고 전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올림픽 준비로 시내를 통제한 파리는 텅 비다시피 해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나의 옛 파리 여행이 그 위로 더 잘 오버랩되는 것 같기도 하다. 나와 여행을 함께 했던 두 사람은 파리가 차갑고 불친절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도를 들고 파리의 이곳저곳을 걸어다녔던 나에겐 파리가 시크한 멋쟁이 같았다. 어디로 눈을 돌리든 보이는 멋진 건축물과 그 속의 파리지앵들도. 일주일 내내 가느다란 비가 내리던 잿빛 거리를 우산도 없이 까만색 트렌치코트 깃을 올린 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근사하던지! 냄새 나는 더러운 지하철, 여행자들의 지갑과 허술한 가방을 노리는 소매치기들, 여러 모로 불편한 시설들,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하지만 프랑스어 인사 몇 마디 외워 먼저 웃으며 말을 건네면 다를걸?)에도 불구하고.     


지도를 들고 걸으면(지금은 구글맵이나 네이버지도를 켜고?) 길은 자신을 더 가깝게 열어 보인다. 보고자 하는 호기심만큼. 그것은 걷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독보적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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