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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플민트 Dec 26. 2022

최악은 신혼여행이었다

'여행메이트'로 거듭나기까지

12월 중순, 신혼여행지인 파리 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밤 9시쯤이었다.

기내식을 잘 못 먹는 난 늦게 도착했지만 파리에서의 첫 식사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반면 기내식을 든든히 먹은 남편은 식사를 대충 때우고 싶어했다.


"난 배가 고프다고! "

난 거리에서 소리를 버럭 질렀고 뒤돌아보지 않고 홀로 걸었다.

때마침 비까지 왔고, 춥고 서러웠던 터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신혼여행의 첫날밤이었다.




싸움은 더 커졌다.

신혼여행 중 이탈리아 베니스로 이동했는데, 이번에는 호텔이 문제였다.

(물론 파리에서 베니스로 이동할 때도 비행기를 놓치는 사달도 있었다. )

남편은 베니스 본섬이 비싸다면서 본섬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메스트레시 기차역 앞의 3성급 호텔을 잡았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바닷물이 찰랑이는 호텔을 기대했던 난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배낭여행도 아니고 이게 뭐야. "

"파리에서 좋은 호텔 잡았으니까 베니스는 좀 저렴하게 해도 괜찮을 줄 알았어. "


집을 구하는데 내 돈이 조금 더 들어가자, 남편이 신혼여행은 알아서 준비하겠다길래 맡겨놨던 게 실수였다.

행복과 낭만이 가득할 걸로 믿었던 신혼여행의 로망은 와장창 깨지고 울고 싸우고.

'과연 이 사람이랑 살 수 있을까'를 내내 고민했던 기억만 남은 신혼여행.

난 지금도 인생 최악의 여행으로 주저 없이 신혼여행을 꼽는다.


연애 시절, 여행을 즐긴다는 공통점이 있어 더 빨리 가까워졌다. 10개월의 연애 기간 동안 결혼하면 시간이 될 때,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짐을 싸고 여행 가면서 살자고 약속했었다.

자유로운 여행은 우리가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여러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의 여행 방식 너무나 달랐다.


내게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가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경험'의 시간이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보다는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게으른 여행자'였다.

파리에 가면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바토뮤슈 등 딱히 관심 없고, 좋아하는 오르세 미술관을 가서 고흐의 작품을 보다가 위층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내려가 또 다른 인상파 작품 보며 하루를 보냈다.  

여행 일정을 꼼꼼하게 짜기는커녕, 하루에 갈 곳 한두 군데를 정하는 수준이었다.

가서 좋으면 계속 머무르고 예상보다 별로면 금방 자리를 떴다.  

먹는 것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해 유명한 맛집이 있으면 예약을 하고 방문했다.

이왕 여행을 갔으면 경비에는 너무 개의치 말자고 생각했다. 경비 생각에 기회와 경험을 놓치는 게 더 아깝다고 여겼다.


하지만 남편은 가성비 좋은 여행을 선호했다.  

비행기 값을 들여서 여행을 갔다면 최대한 많은 곳들을 돌아다니고 보는 게 효율적이라고 믿었다.

남편에게 여행은 '관광'이었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이 금이었고, 일정은 분 단위로 짜일 정도로 촘촘했다.  

파리를 몇 번 가든 에펠탑을 낮과 밤으로 보고, 오페라 가르니에를 가고 바토뮤슈를 타야 했고 신개선문인 라데팡스도 들러야 했다.

사지 않더라도 남들 다 간다는 샤넬 매장, 루이비통 매장 앞을 가야 했다.  

먹는 데 시간을 쓰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음식점은 접근성이 제일 중요했고 가다가 들를 수 있는 곳이나 그중에서 사람이 많은 곳이면 만족했다.

여행을 왔어도 자신이 생각했을 때 합리적이지 않은 비용, 바가지요금에는 기분이 상한다며 돈을 쓰지 않으려 했다.


결혼하면 최고의 여행 메이트가 될 줄 알았던 우리는 여행지마다 수없이 싸움을 반복했다.  

남편은 현지인들처럼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싶어하는 날 이해하지 못했다.

난 여행지까지 와서 시간을 맞추기 위해 뛰어다니게 일정을 짜는 남편이 숨 막혔다.




결혼 5년.

여름휴가차 간 크로아티아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8일의 여름휴가 동안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스플리트, 두브로브니크까지 짐을 싸들고 이동하다 내가 스플리트에서 지독한 감기 몸살로 몸져눕게 된 것이다.

이틀을 꼬박 누워만 있는 날 간호하면서 남편은 일정이 내게 무리라는 걸 실감한 듯했다.


"자기가 힘들다고 할 때 진지하게 듣지 않아서 미안해. 많이 돌아다니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파서 못 움직이면 무슨 소용이겠어. "


이후 남편은 일정을 줄였다.

한 도시에서 머무는 시간을 늘리고 일정을 줄였다.

자신이 꼭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여행 중 잠시 혼자 다녀왔다.

밤 일정을 잡았을 때는 점심식사 후 오후 3~4시쯤 숙소로 들어와 한숨 자거나 휴식을 취하고 다시 나갔다.


일정이 줄어들고 중간중간 휴식 시간이 생기면서 여행은 숨통이 틔였다.

머물길 원하는 곳에서 좀 더 머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내 의견이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나도 일정 중 가까운 맛집을 찾아 제안하는 등 역할을 찾았다.

의견 충돌이 싫어 여행 일정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던 태도에서 바뀐 것이다.


이동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는 맛집 방문에 남편도 동의하면서 우리는 식도락을 공유하게 됐다.

호텔 조식을 포기해 비용을 아끼는 대신, 카페 야외 테라스에서 아침 햇살을 느끼며 토스트와 커피 한 잔을 하는 여유를 함께 즐기게 됐다.

조금씩 양보하면서 여행지에서 함께 보고 즐기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암묵적으로 일정을 짜는 일, 인근 맛집을 찾는 일 등을 나눠서 맡아했다.




"갑자기 왜 토요일에는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는 거야? 그럼 구글에 써놓던가. "

"그러게. 당황스럽네. "

"이제 어디서 밥을 먹어. 딱히 갈 곳도 없는데, 진짜. "

"다 계획대로 되면 그게 여행인가. 이것도 재미지 뭐. 가다 보면 다른 데가 또 나오겠지. "

"그런가. 그래, 가보자. "


11월 겨울 휴가차 스페인 말라가.

서방은 계획했던 음식점을 가지 못하자 짜증을 냈다.

하지만 난 이전과 다르게  "또 시작이다", "그만해라"라고 맞받아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웃으며 그를 달랜다.

그는 '더 이상 짜증 내지 말라'는 신호임을 눈치채고 얼른 평정심을 되찾는다.


결혼 10년, 그리고 여행메이트 10년.

우리는 여전히 여행을 가면 언쟁을 벌이거나 벌일 위기에 놓인다.

하지만 이제는 적당한 선에서 양보하고 타협하는 눈치를 터득했다.

우리의 여행도 타협의 산물처럼 '경험'과 '관광', 그 어디쯤엔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맞춤형 여행메이트가 돼가고 있다.


지난 11월 다녀온 스페인 말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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