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믿는 구석이 사라지다
결정타는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죽음이었다. 퇴근하기 직전 아파트 옆동 사는 막내고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할머니, 갑자기 쓰러지셔서 응급실로 가셨대. 마음의 준비를 해서 내려오라는구나. "
울먹이는 고모의 목소리에도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됐다. 마음의 준비라니... 돌아가실 수 있으니 장례식까지 치룰 정도의 짐을 챙겨가야 한다는 얘기였지만, 난 온 마음을 다해 알아듣기를 거부했다. KTX를 타고 대구로 향하는 동안 고모는 내내 울었다. 그리고 병원에 거의 도착해 택시 문을 열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마치 영화처럼 간발의 차이로 할머니의 임종을 놓쳤다.
할머니가 댁에서 갑자기 쓰러지시고 사망 선고가 내려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4시간 남짓. 마지막 저녁식사까지 잘 마쳤던 할머니는 자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떠나셨다. 자식에게 부담이 되길 원치 않았던 당신이 원하던 방식으로.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했던 할머니를 순식간에 잃었다. 가게를 운영한다고 바빴던 엄마 대신 할머니 손에 커 지금까지도 엄마보다는 할머니가 더 편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아묻따' 내 편인 사람이 할머니였다. 대학을 서울로 가겠다고 했을 때 다들 반대했지만 "내가 보내겠다는 너네가 왜 반대해?"라며 한마디로 평정했다.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난다고 했을 때, 다니던 외국계 금융회사를 때려치우고 언론사 기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4살 어린 남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부모님보다 더 날 믿고 지원해줬다.
내 인생의 슈퍼맨, '믿는 구석'을 잃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상실감이었다.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것, 버팀목을 잃는다는 건 잃은 당시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실감하게 됐다. 내가 힘들 때 손 내밀어 주고 내 편이 돼 줄 사람, 나를 뒤에서 든든히 지원해줄 사람은 이제 없었다. 자신감이 사라졌고 불안했으며 순간 순간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는 남편을 유난히 예뻐하셨다. 36살 손녀에게 뒤늦게 배필이 찾아온 것에 감사하고 행복해하셨다. 서울에 올라오시면 고모들의 집을 두고 손녀 집으로 오셨다. 남편과 내가 출근하느라 거의 비어있는 우리 집이 편하다 하시며 손녀사위 식사를 챙겨주셨다. 남편도 그런 할머니를 모시고 자주 꽃구경을 다녔다. 그렇게 남편이 할머니의 사랑을 추억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주시고는 돌아가셨다. 마치 자신의 할 일을 다 끝냈다 생각하신 것처럼 홀연히.
02. 남편마저 사라진다면?
"너 나중에 남편이 아이를 갖고 싶어하면 어떻게 할 거니?"
"그 사람이 저보다 더 안 가지고 싶어해요. "
"네 남편, 아직 어려서 그래. "
"어리지 않아요. 그 사람도 37살인데. "
"얘, 너에 비하면 4살이나 어리잖아. 네가 아이 못 가질 때 남편은 갖고 싶어하면 어떻게 하니. "
공허한 마음은 매일 듣던 말에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었다. 또 다른 상실이 두려운 내게 남편의 마음이 변할 수 있다는 말은 파급력이 꽤 컸다. 사람의 마음이 상황에 따라 쉽게 바뀌고 변할 수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일단 바꿔먹은 마음을 남의 의지로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친한 언니의 걱정은 내게 전염됐다.
나폴레옹은 6살 연상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조세핀에게 첫 눈에 반했다. 전투에 나간 동안 쓴 편지가 7만 통에 달한다. 군인으로 여자를 대하는 게 서투르고 불편했던 나폴레옹에게 조세핀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장래를 보고 결혼했지만, 나폴레옹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내연남과 바람을 피웠다. 하지만 조세핀을 운명이라고 믿은 나폴레옹은 참고 넘어갔다.
나폴레옹에게는 큰 꿈이 있었다. 당시 신성로마 제국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오스트리아와 통합해 프랑스-오스트리아 통합 황실의 왕관을 자신의 후손이 이어가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후 조세핀과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2세가 생기지 않은 것을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황후 탓이라고 확신했다. 내연녀 마리아가 임신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이혼을 통보했고 조세핀은 기절했다.
사랑하는 조세핀을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나폴레옹은 버린 것이다. 자식 때문에 한 때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던 아내를 떠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남편도 나폴레옹 같을 수 있다는 걱정, 남편마저 사라지면 혼자가 될 것이라는 불안은 스멀스멀 불이 붙더니 급기야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상상 속에서 내 스스로를 비련의 여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걱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나폴레옹으로부터 왕관을 수여받는 조세핀.(자크루이 다비드 作)
03. 아쉬움 더해진 후회를 않기 위해
어느덧 내 나이 41살, 만 39세.
아이가 생기기 쉽지 않은 나이였다. 만약에 임신을 시도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나이가 더 들면 아이를 가지려는 시도조차 못하게 될 수 있다. 신체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을 때가 도래하면 아이를 가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지금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다.
"결혼하라.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말라, 그래도 역시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
이 어록을 남긴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약혼녀 레기네 올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약혼녀인 레기네를 유혹해 뺏은 후 청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청혼한 지 1년이 지나기도 전에 파혼했다. 결혼해서 하는 후회보다 결혼하지 않고 하는 후회를 선택한 것이다.
비슷한 말을 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결혼을 하고 후회하는 쪽을 택했다. 그 결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스러운 욕을 퍼붓는 '희대의 악처' 크산티페를 만났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결혼을 권했다. "좋은 처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라는 농담을 하면서 말이다.
안 해도 후회, 해도 후회라면 소크라테스처럼 하고 후회하는 득이 아닐까 싶었다. 키에르케고르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하면 '할 것 그랬다'는 아쉬움이 얹어진 후회 말고는 얻는 게 없다. 반면 소크라테스처럼 하는 것을 잘 되면 행복할 가능성이 있고, 잘 안 되더라도 경험을 얻거나 미련을 떨칠 수 있다.
임신에 도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도전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지만, 시도라도 해볼 걸이라는 미련이 계속 남을 거 같았다. 대신 임신에 도전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적어도 남들이 가는 길을 기웃거리는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도전 과정에서 내가 진정으로 아이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도 좀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련과 아쉬움을 떨치기 위해 임신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내 나이에 아이가 쉽게 생기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어느 정도 각오한 결정이었다.
04. 딩크족의 변심
결혼 6년차, 나는 남편에게 아이를 가지기 위해 노력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40세를 넘은 내 나이와 후회에 대한 우려를 변심의 근거로 들었다. 아직 아기를 가질 수 있을 때 노력해보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를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거 같다고 주장했다. 차후에 가정이 깨질 위기에 처했을 때 자녀가 방패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편은 당황스럽다는 듯 날 쳐다봤다. 가정이 깨질 위기를 조장하고 남편의 마음이 추후에 바뀔 가능성을 상정해 아이를 가지겠다고 하는 게 참 억지스러우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싶다. 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마음의 추가 기울어진 상태였고 남편의 감정이나 의견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일방적이다 싶은 내 말과 표정에서 남편은 무엇을 읽었을까. 20초 정도의 정막이 흐른 뒤에야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이를 안 갖기로 합의한 거 아니였어요? "
"응. 근데 합의는 당사자들 중 한 쪽이 변하면 깨지는 거니까요. "
남편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외출을 했다. 한 시간 가량 뒤에 집으로 돌아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최선을 다 하되, 만약에 안 생기면 그 때는 미련없이 접는 거예요. 약속할 수 있어요?"
"그럼요. "
우리는 그렇게 임신을 위해 노력해 보기로 했다.
딩크족 남편에게 아이 갖자고 선언했습니다|딩크여도.. 괜찮아?(1) (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