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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플민트 Apr 30. 2023

부부의 세계

딩크를 결심하다

01. 공동목표는 성공한 육아


결혼 20년 차 친구 K는 술 마시고 귀가해 공부하던 고3 아들과 싸운 남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수험생 아들이 의대를 가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중차대한 순간, 남편은 가족의 최대 빌런으로 등극했다.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속 타노스급이다.


지금은 아들의 심기를 거스를 때가 아니다. 아들이 아무리 버르장머리가 없어도 혼내서는 안 된다. 입시를 위해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남도 아닌 애 아빠가 빌런이 되다니.


K는 남편을 향해 "미쳤다"는 말까지 써가며 분노를 표했다. 내가 한 마디 건네봤지만 화만 돋웠다.


"애도 딱히 잘한 건 없구먼. "

"그래도 고3 애랑 싸움 안 되지. 지랑 나랑은 공동 목표가 있잖아. 아들을 의대에 보내야 한다는 목표!"


목표 의식이 뚜렷한 부부의 세계.


K부부를 이어주는 끈은 아들을 의대에 보내는 목표였다. 그 목표를 향해 K 남편은 돈을 벌었고 K는 아들의 교육을 도맡아 커리큘럼을 짜왔다. 대치동 학원으로 번갈아가며 애를 데리러 갔다. 그 목표가 없다면 한 때는 사랑했지만 지금은 밥조차 같이 먹기 껄끄러운 남편과 굳이 같이 살 이유가 없다고 했다.


아이 없는 부부에게 하는 사람들의 조언은 다 비슷했다.  부부를 닮은 자녀는 부부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라는 것이다. 남녀 간 기본 연결고리로 여겨지는 사랑은 어느 순간 옅어지게 마련이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내야 한다는 목표를 공유하는 게 부부라고 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자녀를 보며 함께 행복을 만끽할 여유는 없다. 회사 못지않게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성과를 내는 게 훌륭한 가정을 꾸리는 거라고 했다. 



02. 무자녀는 이혼의 충분조건?


게오르그 헤겔(Georg Hegel)은 부부간 사랑이 추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구체성, 객관성, 현실성을 지니려면 자식이 필요하다고 봤다. 형체 없는 부부간 사랑이 남들도 알아볼 수 있도록 외적으로 나타난 결실이 자녀라는 거다. 이후 부부는 상대방의 모습을 닮은 자식을 사랑함으로써 관계를 이어간다고 했다.


딩크 결정을 할 때 가장 고민한 것도 이 지점이다. 부부는 자식을 사랑함으로써 유지되는 관계라는데, 자식이 없다면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


'카더라 통신'으로 들어왔던 아이 없는 부부의 모습 행복하지 않았다. TV만 켜면 나오는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서 아이가 없어서 바람난 남편, 아이가 없는 며느리를 구박하는 시어머니가 등장했다. 눈물과 상처, 아픔은 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의 몫이었다.


"순이 엄마네 친구 아들내미 부부, 걔네 이혼했잖아. "

"어머나, 왜 이혼했대? "

"애가 없다나 봐. "

"아…. "


주변인들이 전해주는 애 없는 부부의 이야기도 비슷했다. 아이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이혼할 만한 하다고 여겼다. 아이가 없는 부부는 안타깝고 눈물로 얼룩진 결혼 생활을 하고 이혼할 가능성이 높다고 받아들다.


정말 아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결혼 생활은 슬프고 부부는 결국 이혼하게 되는 걸까. 아이가 없는 결혼생활은 유지되지 않 걸까.  '카더라 통신'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딩크 부부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결혼한 지 10년 이상 지난 딩크가 소수이기도 하거니와, 있다 하더라도 무자녀 사유를 모른 채 무턱대고 행복도를 물어보기 난감했다.   


충분한 사례 없이 딩크가 부부 사이에 미칠 영향을 유추하기는 어려웠다.



03. 무자녀 부부 만족도 나쁘지 않다


아이의 유무와 부부의 만족도를 계량화한 연구가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결혼 1~7년 차 신혼부부 1779명을 상대로 심층면접하고 발간한 '기혼 부부의 무자녀 선택과 정책 과제 연구보고서'이다.


보고서는 아이 없는 부부의 결혼생활 만족도가 유자녀 가정보다 상대적으로 높다고 결론지었다. 무자녀 부부의 결혼 만족도는 평균 7.82점으로 유자녀 부부 7.54점보다 다소 높았다. 가사분담 비율도 무자녀 부부의 남편이 39.8%로, 유자녀 부부의 남편(31.2%) 보다 더 높았다.


아이 대신 배우자에게 관심을 쏟으면서 자연스럽게 결혼 만족도도 커졌다는 연구원의 분석이다. 무자녀 부부 대상 심층면접에서 이런 경향이 확인됐다.


소신에 따라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남성 A 씨는 “아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 부부관계는 오히려 더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아이가 없어 직장생활이나 여행, 음식 메뉴 선정 등에 본인과 배우자의 취향만 반영하면 되고, 아이 양육비가 들지 않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사례가 있었다.



우리 부부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관심은 서로에게 맞춰져 있어 결혼 생활아 연애 시절의 연장선 같았다. 두 사람의 욕구만 충족시키면 되니 교대로 충족해도 서로 한 번씩만 양보하면 됐다. 양육비가 들지 않으니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없는 한 상대가 사고 싶은 걸 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자전거 타기, 등산을 같이 하고 여행을 훌쩍 떠나는 등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많았다.


가족 구성원이 2명의 성인이라면 해야 할 과제들이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빨래와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하면 됐고, 설거지는 양이 얼마 되지 않아 내키는 사람이 했다. 아이가 없으니 양가 부모님도 굳이 방문을 강요하지 않았다.


삶이 단순한 만큼 싸울 일이 많지 않다. 9년 동안 1000여 건의 이혼 소송을 지켜봐 오며 웹툰 '메리지 레드'를 그리는 최유나 변호사는 80년대생 부부들의 이혼 사유 90% 이상이 육아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육아가 없다.


물론 싸울 일이 없지 않다. 싸우게 되면 가족 구성원이 단 둘이라는 게 가장 큰 난관이 된다. 문제 해결을 미루거나 회피할 수가 없다. 싸움이 길어지면 둘 다 숨이 막힌다. 유자녀 부부와 달리 갈등이 생기면 중재해 주거나 상황을 모면하게 해 줄 아이의 재롱이나 미소는 없다. 잘 싸우고 화해하지 않으면 집은 순식간에 감옥처럼 갑갑해진다.  


힘든 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싸우지 않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해 갔다.  상대의 특징을 파악해 최대한 부딪히지 않고 상대가 싫어하는 건 피하려 하는 지혜가 생겼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는데 시간을 투자했고 제일 친한 파트너, 친구가 되어갔다.



04. 부부가 중심인 가족


내가 생각한 결혼은 부부가 중심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가정을 꾸리고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 결혼을 맘먹었을 때 자녀가 결혼 생활의 중심인 삶을 예상하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내가 그렸던 결혼의 본질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목표라면 나도, 남편도 하고 싶은 걸 하고 상대가 혼자 남는 시간이 길지 않도록 최대한 건강하기인 것 같다.


전래동화 <선녀와 나꾼>에서 선녀는 나무꾼이 숨겨놨던 날개옷을 주자 주저 없이 하늘로 돌아가버린다. 남편에게는 말도 없이 두 명의 자녀를 데리고 훨훨 날아가버렸고 결혼은 파국을 맞는다. 자녀 2명을 낳고 살았어도 선녀는 떠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나무꾼을 버리고 떠났다. 사슴의 말과 달리 자녀가 3명이 된 후 선녀옷을 돌려줬어도 선녀는 떠났을 거 같다.  


선녀의 입장에서는 자녀가 있다는 게 나무꾼을 떠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조상들은 자녀가 결혼 생활을 유지시켜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나 보다.   


딩크 12년 차.

애가 없으면 부부가 오래 같이 살기 힘들다던 주변인들의 우려는 사라졌다. 아이 덕분에 생기는 큰 행복은 없지만 상대적으로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우리를 보면서 말이 바뀌었다.  


너네 부부는 얘가 없어서 사이가 좋은가 보다.

아이 없는 부부에 대한 편견, 고정관념이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다니 다행이다. 아이 없는 부부의 삶, 그건 카더라 통신이나 일반 상식과 달리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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