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건 수정란을 이식한 이후부터였다. 의사가 그럴 필요 없다는데도 엄마는 꼼짝 말고 누워만 있으라며 감시했다. 쓸데없는 성실함은 이럴 때 또 빛을 발해 최선을 다해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그게 이 모든 과정을 빨리 끝내게 해주는 지름길이라 믿었다.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 것은 이틀 연속 밤샘 근무만큼이나 고역이었다. TV에서는 같은 프로그램을 일주일 동안 수도 없이 재방송한다는 것을 알았고, TV를 하루종일 보면 멀미 나는 것 같은 몸 상태가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2주가량의 지긋지긋한 시간을 견디는 힘은 착상에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이다. 나이와 건실한 난자 수만으로도 이미 패색이 짙었지만, 어리석게도 희망은 마음 한편에 똬리를 튼다. 소수의 실한 난자 수와 노화된 자궁에도 불구하고 임신에 성공했다는 이들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배가 콕콕거리기라도 하면 '혹시 착상이 됐나'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희망과 기대는 속옷에 피가 비치는 즉시 무참히 깨지고 만다. 배란촉진제를 시간 맞춰 배에 놓고 수정란을 이식해 온 한 달 반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희망은 한껏 부풀었던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순식간에 사라진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는 좌절이 차지한다.
배란촉진제를 맞는 순간부터 한 달 반 가량, 그 짧은 시간 동안 감정은 양극단으로 치닫는다. 실패했다는 좌절, 나만 엄마가 되지 못한다는 억울함 등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02.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
1년 전만 해도 큰 걱정도, 불만도 없이 소소한 일상에 행복을 느끼며 살아왔다. 웃음이 많았고 종종 "행복해"라는 표현도 지냈다. 주된 관심사는 어디로 여행을 갈지, 저녁식사 메뉴는 뭘로 할지 정도였다.
하지만 4번의 시험관을 반복하는 사이, 난 세상 누구보다 불행한 여자가 돼 있었다. 남들에게는 당연하게 생기는, 아니 원치 않아도 생기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니 자존감이 더없이 낮아졌다. 4번의 시험관 시술 중 착상조차 한 번 되지 않았다. "참기름 자궁인가 봐"라며 뒷맛 씁쓸한 농담만 할 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TV를 보고 있어도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이 말을 건네도 들리지 않았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내 몸과 그동안 생활습관의 무엇이 잘못된 건지 아무리 파헤쳐봐도 답을 알 수 없었다. 임신이라는 신의 섭리 앞에 나는 무기력하게 결과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꼬마 아이가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네도, 엄마 품에 안긴 갓난아기를 만나도 눈물이 맺혔다.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싶었다. 자녀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 세상 모든 아기 엄마가 부럽고 또 부러웠다. 회사에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배들의 임신 소식이 들릴 때면 속상하고 질투 났다.
자책, 자기혐오, 원망, 질투 등의 못난 감정들이 내 안에 똬리를 틀고 괴롭혔다.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낮은 자존감과 우울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이 못난 감정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이때 찾은 취미가 자전거 타기였다. 시험관 시술에 좋지 않다는 엄마의 잔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강공원 자전거도로를 달리면서 못난 감정들을 날리고 자연에서 위안을 얻고 싶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나면 또 새로운 시험관 시술이 시작됐다.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희망과 기대는 스멀스멀 올라왔고, 또다시 착상에 실패하면 앞서 보다 더 큰 절망이 찾아왔다. 감정은 반복되면 무뎌지기 마련이건만, 시험관 시술 실패에서 오는 상처는 더 크고 깊어져 내 마음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공부나 업무처럼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온라인 난임 커뮤니티에는 규칙적으로 생활해 몸을 더 건강하게 만들고, 커피나 탄산음료를 마시지 말아야 한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수많은 조언들이 있었지만 그걸 다 지키는 건 불가능했다. 삼신할머니가 점지해주지 않는 이상, 나도 의사도 난임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할 수 없었다.
실패가 거듭될수록 못난 감정은 커져갔고 속수무책으로 압도당했다. 저항 의지는 꺾였다.
03. 진정 원하는 것을 깨닫다
'언제부터 아이를 이리도 간절하게 원했지?'
회의가 들었다. 행복과 웃음을 잃은 채 슬픔에 빠져 너덜너덜해진 내가 보였다.
절망과 자기혐오의 고통을 이겨내면 심적으로 더 성숙해질 거라는 위로에 공감가지 않았다. 상대를 질투하는 감정,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절망은 살면서 느끼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나 스스로에 대해 실망하고 혐오하는 감정은 감내하기도 힘들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 고통스러운 감정을 몰랐던 때로, 경험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인 뤼방 오지앙은 췌장암을 앓으면서 쓴 마지막 에세이 <나의 길고 아픈 밤>에서 고통이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는 '고통효용론'을 비판했다. 고통은 고통일 뿐이라는 것이다. 시련을 발판 삼아 도약하는 마음의 근력인 '회복탄력성'도 낙관적인 허언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힘든 상황도 긍정적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심리학은 절망을 극복할 힘이나 의욕이 없는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할 뿐이라고 했다.
6개월 전으로 돌아가야겠어.
4번째 시험관 시술도 실패로 돌아가면서 더 이상의 시술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험관 시술을 6개월만 하고 포기하는 사람은 잘 없다", "적어도 1년은 해야 한다"는 주변인의 만류가 이어졌다. 반복된 시험관 시술 끝에 아이 갖기에 성공한 사연들도 수없이 들렸다.
하지만 나는 딩크족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조차 갖지 못했던 확신이 생겼다. 미래의 행복을 담보로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좌절과 실망, 혐오를 감내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생겨 얻을 핑크빛 미래보다 당장의 행복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상처받고 망가진 나를 보듬고 행복을 되찾고 싶었다.
4번의 시험관 시술은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아이를 얻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미련 없이 당장 행복해지는 길을 가고 싶다는 확신을 얻은 건 소득이었다.
그렇게 난 엄마가 되지 않기로 결정했고 6개월의 휴직을 마감하며 복직했다.
04. 망각의 동물
인간의 뇌는 강렬한 고통을 준 사건, 또는 연관된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손상시켜 기억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당시의 기억을 소환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세세하게 감정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상황과 감정을 비교적 꼼꼼하게 기억하는 편인 내게는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그저 시험관 시술 당시 힘들었다는 덩어리째 기억만 있을 뿐 토막 내 자세히 들여다보고 감정을 재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