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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플민트 Jun 19. 2023

딩크족 남편의 반전 매력

01.  "우리 일이야"


"나 혼자 가도 괜찮아. "

"아니야. 함께 노력하기로 했으니 같이 가자."


시험관 시술을 위해 8개월 남짓 난임병원을 다니는 동안 남편은 단 한 번도 날 혼자 가게 두지 않았다. 긴장감이 흐르는 대기 시간을 함께 했고 진료 시간에도 같이 의사를 만났다. 진료가 끝나면 함께 식사를 한 뒤 집으로 바래다주고서야 출근했다.


8개월가량 유지되는 패턴을 남편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휴직 전 병원 갈 때마다 반차와 연차를 번갈아 내는 게 눈치 보였는데 남편은 오죽할까 싶었다.  "유별나다"는 소리를 들을 거 같아 미안하고 걱정됐다. 하지만 남편은 그와 관련한 수고로움이나 곤란함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안 해도 될 걱정을 한다며 웃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수고로움을 생색내지도 않았다.  


사실 "혼자 가도 괜찮다"라고 큰소리쳤지만, 난임병원에서 남편이 '실과 바늘'처럼 함께 있다는 건 심적으로 큰 의지가 됐다. 대부분의 시술이 자궁이 있는 내 몸에서 이뤄지다 보니 오롯이 여자의 문제처럼 느껴져 외롭고 서러울 수 있는데, 남편은 모든 과정을 함께 하면서 난임이 우리의 문제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줬기 때문이다.  

그 덕에 나는 시험관 시술 과정에서 웃을 수 있었다. 남편은 난임 여성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는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표정이 굳어버리는 나를 보면 실없는 농담을 해 어이없이 웃겼다. 시험관 시술 후 받은 피검사 결과 착상이 되지 않아 한없이 속상한 내 곁에도 남편이 있었다. 말없이 내 손을 꼭 잡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밖을 걷고 싶다고 하면 한강공원으로 가 바람을 맞으며 걸었고, 멍하니 있고 싶다고 하면 내가 '곁에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서 나를 지켜봤다. 울고 싶다고 하면 꼭 안아 기대어 울 수 있게 해 주고 휴지를 건넸다. 맛있는 게 먹고 싶다고 하면 열심히 맛집을 검색해 데리고 갔다. 


그의 태도와 지지는 그렇게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02. 딩크족 남편의 반전 


사실 아이를 갖기로 하면서 가장 걱정한 건 남편의 태도였다. 


남편은 딩크족으로 살고 싶다고 먼저 제안했고, 결혼 생활 내내 딩크족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 대학 시절부터 가장의 무게를 짊어졌던 그는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갈망했고 부양의 부담에서 할 수 있는 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딩크족으로 살겠다는 결심에서의 동기가 다소 부족한 내가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고 장담하며 다잡은 이가 남편이었다. 


결혼 6년 만에 아이를 갖겠다는 건 나의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이기적 이게도 남편의 심경이나 남편에 대한 설득 과정 등은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내 감정에 휩싸여 남편의 혼돈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각종 언쟁에서 져본 적 없다는 소위 '논리대마왕'  남편이 자신이 배제된 일방적인 결정이라고 강하게 반발할 것이 예상됐다. 남편이 당황하고 곤혹스러워할 게 뻔했지만, 나는 '모른 척'으로 일관하겠다는 전략 같지 않은 전략도 세웠다. 


전투를 단단히 준비한 장군 같은 기세였다. 빈약한 논리 대신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로 싸워 이기겠다는 병법이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것"과 "40살이라 더 늦으면 임신 시도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우며 남편의 그 어떤 논리도 다 무찌를 예정이었다. 


남편에게는 나의 일방적인 선언에 성심성의껏 따르느냐, 적당히 따르는 척하느냐라는 두 가지의 선택만이 있었고 빨리 선택해야 했다. 


혼자 꽤 오래 고민했나 보네. 


내 선전포고를 들은 남편의 첫마디는 예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후회할 것 같다"는 내 말이 결정적이었단다. 후회가 해소되지 않고 마음 한 편에 쌓여가면 언젠가 한 번은 터진다는 걸 본인 어머니의 삶을 통해 체감했기에, 내가 그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편은 피 튀기는 전투를 준비한 내가 미안할 정도로, 별다른 저항 없이 '임신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03. 아이 대신 동반자를 얻다


남편의 순순한 동의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딩크족이었던 만큼 '임신 프로젝트'에 마지못해 동참하는 척 정도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혼을 결심하지 않는 이상, 남편에게는 내키지 않는 결정에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또다시 깨졌다. 남편은 나 못지않게 적극적이었다. 4개월가량의 자연 임신 시도와 8개월 간의 시험관 시술에 최선을 다해 임했다.  '배란기'란 말이 나오면 열 일 제쳐두고 날 만나러 왔다. 이 사람이 나보다 아이를 더 원하는데 그동안 아닌 척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난임은 남편에게도 낯선 세상이었다. 어떤 병원이 분위기가 좋겠느냐마는, 난임병원에서는 다들 너무나 간절하고 기다림에 지쳤다는 느낌이어서 놀랐고 위축됐단다. 나 홀로 이 느낌을 감당하게 하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병원은 절대 혼자 가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남편은 스스로 그 약속을 지켰다. 반복되는 시험관 시술도 고달파 보였고 그걸 겪어내는 내가 안쓰러웠다고 했다. 내 몸이 고생하는 모습에 자신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옆에서 손이라도 잡아줘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04. 행복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다


"자기는 최선을 다했어. 그래도 안 생겨도 어떤 후회도 하지 말자."


우리는 4번의 시험관 시술을 받았지만 아이를 갖지 못했다. 난 반복된 희망 고문으로 너덜더덜해진 내 감정을 보듬고 회복하고 싶어 시험관 시술을 그만하겠다고 선언했다. "중단해도 후회가 없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최선을 다한 나 스스로와 남편 덕분에 "후회 없다"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마음을 깨끗하게 접었다. 


무자녀 부부의 일상으로 돌아왔고 절망과 자책, 자기혐오, 질투 등으로 뒤엉켜있던 내 감정도 회복돼 갔다.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것 같았던 1년 남짓한 기간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일상은 빠르게 예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서로를 향한 마음은 시험관 시술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시험관 시술을 통해 우리가 한 팀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내 부탁에 자신의 소신을 접고 '임신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임해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가졌고 언제든 내 편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됐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환상적인 로맨스 보다 안정과 신뢰가 더해진 현실 로맨스에 더 감사하고 만족하게 됐다.  


남편은 시험관 시술 이후로 모든 일에 최우선을 나로 뒀다. 나의 고민과 고통을 온몸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내가 어떤 걸 포기해서든 지켜야 할 존재, 지키고 싶은 존재가 됐다고 했다. 내가 얘기하면 최대한 들어줬고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는 건 하지 않으려 했다.  


'아이 없이 우리가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풀렸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할아버지가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할머니 병원 가는 길을 따라나서며 아픈 무릎을 '호~'하고 불어줬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위하며 살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의 사랑과 신뢰에, 세월만큼의 애틋함이 더해져 세월이 그렇게 지나는 줄도 모르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난임, 시험관 시술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동반자로 거듭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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