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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플맘 Nov 07. 2020

육아와 일 사이 그 어딘가(1)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고백할 것이 있다. 

지난 에피소드들에는 내가 밤이면 열심히 그림들을 그려 인스타에 올린 후 사람들과 소통한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지난 한 달 넘게 거의 내 개인 작업(이윤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주로 육아와 관련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자유 시간이 있었는데도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먼저 있었던 일들을 말하자면 애플이를 첫 어린이집에 보낸 후 적응 기간이 필요했고 

그 적응 기간 동안 나는 그곳에 적응해야 하는 애플이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편은 예전처럼 여전히 주 5일 출근을 해야 했고 

상대적으로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프리랜서인 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애플이를 챙겨야 했다. 

한 번은 내가 아침에 남편과 함께 애플이를 데려다주러 어린이집을 따라갔다가 애플이가 자신의 담당 선생님이 아직 안 왔다고 낯선 사람들만 있는 어린이집에 들어가기 싫어 우는 바람에 아기와 함께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한 시간 넘게 그곳에 같이 있었던 적도 있다. 

애플이가 어린이집에서 적응을 못해서 힘들어할까 봐 어린이집에서 오는 전화를 기다리며 긴장상태에서 폰을 계속 들고 다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그냥 어린이집을 취소할까 말까 하루에 몇십 번도 넘게 고민을 했었다.


한 달 정도 걸렸던 아이의 적응 기간 동안 아기는 물론이고 나도 그러한 새로운 상황에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는 낮과 밤에 일들을 해야 했고 피곤하고 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애플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일 생각에 넋이 나간 내가 놓치는 바람에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눈 위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었다.

(다행히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서 큰 문제는 없었고 지금은 흉도 안 지고 다 아물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의 죄책감은 어마어마했다.)


그런 정신없고 지치는 상황들 속에서 당신에 내가 맡아서 하던 프로젝트의 진행속도는 느려졌다.

(물론 그건 명백한 내 잘못이다.) 


어느 날 기분이 상한 클라이언트(한국인 남성분)가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일 진행 사항에 대해서 물어봤다. 


클라이언트(클라이언트는 이하 '클'로 표시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왜 지난 며칠간 연락이 없으셨죠? 일은 잘 진행되고 있으신가요?"


나: "죄송합니다. 이번 달에 저희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적응 기간 때문에 그동안 제가 정신이 많이 없었습니다. (아기가 아프다는 말까지 하기에는 너무 구구절절한 핑계로 들리는 것 같아서 그 얘기는 빼고 가능한 간단하게 내 상황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제가 남은 일들은 가능한 한 빨리 꼼꼼하게 마무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클: "하... 그건 당신 사정이고요. 내가 왜 당신 사정까지 봐줘야 하죠?

그리고 당신 애이지 내 애인 가요?

지금까지 일 참 잘하신다고 생각했었는데 프로젝트가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이 시점에서 실망이 크네요."

 

나: "죄송합니다..."


클: "됐고요 더 이상 같이 일 못 하겠어요.

저는 다른 사람을 알아볼게요.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그만 작업하셔도 됩니다."


나: "네... 알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남은 일들은 지금까지 처럼 정성을 다해 마무리한 다음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얼마 뒤, 내가 맡아서 하던 일의 담당자는 바뀌었다.

홈페이지에서 결과물을 보니 작업자는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작업으로 보였다.


' 이 작업자는 분명 나보다 어릴 거야.
그럼 아직 아기가 없는 사람이겠지... 아마 아직 결혼도 안 했을 수도 있어...
그럼 아무런 개인 사정없이 일도 빨리빨리 할 테고... 
이번의 나처럼 작업 속도가 느려지는 상황도 발생하지 않을 테지...



내가 애플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가능한 내가 하는 일들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집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기를 돌보다가 밤에 일을 몰아서 하기에는 작업 속도가 너무 더뎠었다.

옛날 아기 엄마가 되기 전에는 하루면 끝났을 일을 이제는 삼사일이 걸려야 끝낼 수 있었다. 


왜 클라이언트가 담당자를 바꾸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나는 속도가 느린 만큼 정말 최선을 다해 꼼꼼하게 작업했었고 

약속한 마감들은 전부 지켰었으며

또 계약서에 적힌 횟수 이상으로 수정 요구가 와도 전부 작업해 줬었는데 

내가 이렇게 내 개인 사정으로 일이 늦춰지자 그쪽은 얄짤 없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버렸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 

평소에 잘 안 마시던 술을 마시고 싶은 날이었는데 

그다음 날 또 애플이를 하루 종일 돌봐야 했길래 그냥 안 마시기로 결정했다.

대신 조용하고 어두운 내 방에서 얼마 전까지 내가 하던 일에 새로운 담당자 이름이 적힌 홈페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하고 생각했다. 


'앞으로 나 같은 아기 엄마를 굳이 쓰고 싶은 클라이언트가 있을까...?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이 세상에 많고 많은데 굳이 나같이 일 속도가 느리고 

아기가 아플 수도 있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는 아기 엄마인 일러스트레이터를 

굳이 쓰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내가 one of them 이 아니라 only one 인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면 되는 것일까? 

(그건 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그럼 내가 아무리 아기 엄마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를 고용해서 쓰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왜 아기를 키우며 예전에 하던 일을 그만두는 엄마들이 많은지 다시 한번 깨달은 나였다.


'내가 뭐라고... 
대단한 사람도 아닌 평범한 사람인 내가 일과 육아 둘 다 해내려고 최선을 다해
버둥거리다가 결국 둘 다 놓쳐버렸네....... 한심하다 한심해....'


그다음 날, 하던 일이 없어진 나는 애플이를 아침부터 돌보면서 멍했다.

애플이를 어린이집에 계속 보내야 할 이유를 며칠 사이에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물론 일은 다시 찾으면 되겠지만... 

다른 일을 하더라도 육아와 일 모두를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사그라든 느낌이었다.

사실 일을 하고 싶은 건지 아닌 건지 나 자신의 기분을 더 이상 알 수조차 없었다.


내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지 저 쪽에서 곰인형 하고 놀고 있던 애플이가 나에게 다가와 껴안아줬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내가 알려준 한국어 문장을 혀 짧은 소리로 말했다.

알려주긴 했었지만 나에게는 처음 말해주는 문장이었다.


"엄마. 난 엄마가 죠아."

나도 울컥하는 마음에 애플이를 껴안으면서 말했다.

"나도.... 나도 애플이 네가 좋아."


작고 작은 애플이를 위에서 내려다보자 애플이 눈 위에 아직 희미한 상처가 보였고 

그것을 보자 그만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내 눈을 감으며 애플 이를 더 꼭 껴안아줬다.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일까?'



(이야기가 길어져서 2편으로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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