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하나씩 비웁니다.

by 애플슈즈

결혼 10여년간 물건이 잔뜩 쌓였다.


열심히 정리했고 수납했기에 크기별로 각잡힌 정리상자와 수납상자 속 물건들은 넘쳐났고


나는 그것을 한번도 제대로 비우지 못했다.


물건이 나를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넓은 집으로 이사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더 큰 평수가 필요했다.


물건이 많아도 차곡차곡 정리했기에 그럭저럭 깔끔해보였다.


그러다 어느순간 정리할 시간이 부족해졌다.


항상 루틴대로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 살림을 정리하고 나면 하루가 꽉 찼는데


밖에 나가 일을 하게 됐고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또 다른 일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얼마동안 집안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집안이 온통 물건으로 가득차 물건 속에 내가 끼어 있는 듯한 압박을 받았다.


모든 것을 비우고 싶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그냥 다 버려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확인하기조차 힘들어졌다.


마음 속 짐도 함께 쌓여가고 있었다.


미루고 미룬 정리는 책정리로 시작되었다.


아이들 연령에 맞지 않은 책, 보지 않은 책,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책을 모두 껴안고 있었다.


버리기는 아깝고 나눔하기는 왠지 어렵고 아는 사람 주려고 하니 하나하나 닦아야 할 것 같았던 수백권의 책을 거실 바닥에 쌓기 시작했다.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버리자."


아깝다고 껴안고 있던 것들,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책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독이었다.


쓰레기장까지 가지고 갈 수 없을만큼 책이 쌓였다.


트럭아저씨를 불러 커다란 트럭에 모두 실어 보냈다.


비우고 나니 숨이 쉬어졌다.


그 후부터 집안 곳곳에 있는 물건들을 비우기 시작했다.


물건을 버리는 것이 환경을 해치는 것 같을만큼 물건이 산더미처럼 버려졌지만


내가 이 쓰레기들을 지구로 보낼 것인가 내 집에 묶어놓을 것이나 하는 고민 후 지구에게 미안한 마음은 버린 후 새 물건을 채우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다짐하고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을 비워나갔다.


불과 몇 달전까지만 해도 거의 매일 택배가 집에 도착했고 매일 마트에서 장을 봤다.


소비의 연속이었고 생활은 소비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일단 조금 비워보자 빈틈이 보이는 사이사이 남겨진 물건들이 눈에 잘 들어왔다.


'이게 여기 있었네.' 하는 생각으로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용하려고 남겨두었던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사용하기에도 하루는 충분했고 몇 주일, 몇 달 동안 택배가 오지 않아도 되는 것을 실감했다.


일주일에 한 두번 장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고 새로운 것이 들어오지 않으면 않은대로 있는 것들을 잘 써나갔다.


물건을 사는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전에는 필요할까봐 샀던 물건들이 이제는 쓰레기로 판명되어 꼭 필요한 물건만 들이는 습관이 생겼다.


냉장고가 텅텅 비어 누군가 보면 살림하는 집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인데 이전보다 더 많이 집밥을 해먹는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과 재료들을 다 버리고 필요한 몇가지만 남겨두었다.


냉장고 냉동실에 칸칸이 소분하고 수납해서 재료들의 보관날짜와 이름을 적어두었던 날들도 있었다.


수많은 재료들, 향신료, 소스들에 이름을 붙이고 예쁜 그릇에 나눠 담으면 살림을 잘 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식료품점처럼 수납장에 꽉꽉 채워진 음식들을 보면 다 사용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힘들어진다.


물건이 많으면 그것들을 기억해둬야하고 적재적소에 꺼내어 사용해야 하고 미처 사용하지 못한 것들은 버려줘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정리는 그렇게 예쁘게 나누고 반듯하게 정리하고 보기좋게 진열하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금방 흐트러졌고 나는 다시 그 모든 물건들을 가지런히 잡아주어야 했다.


소품, 장난감, 책, 옷, 신발, 잡동사니 모든 것이 집안에 넘쳐났고 그것들의 주인은 나였다.


내가 돌봐줘야 하는 것들을 줄이기 시작하니 마음이 간결해졌다.


매 주 자동차 한 가득 실어 갖다 버리는데도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곳들이 많다.


신지 않은 양말, 스타킹, 쓰지 않는 낡은 캐리어, 혹시나 해서 남겨둔 화장실 미끄럼방지패드, 예쁘다고 하나씩 사둔 발받침대, 실내화, 잘 신지 않는 신발, 우산, 들지 않는 가방, 수많은 학용품....


각각 자리를 잘 잡아두라고 하는데 이 물건은 어느 자리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잡동한 물건들,


내가 이 물건들과 같이 살고 있다. 편안한 내 집에 수많은 자리를 내어주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치우고 옆으로 밀어 정리하고 빨래하고,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씻기고 재우고 일하고

..


나의 일상만을 쫓아가기에도 급급했고 그렇게 꼭 해야만 할 일들을 한 채 하루, 한달, 일년, 이년, 십년을 지내다보니 깊숙한 곳곳에서 알지 못할 물건들이 발견됐다.


신분증, 필요했던 소모품, 5년 지난 습기제거제, 7년 지난 헤어에센스, 포장도 안뜯은 화장품...


모두 먼지 쌓이고 색이 바랜 채 내 손이 닿기를 기다렸다.



물론 내가 전혀 미니멀리스트도 아니고 미니멀하게 살고 있지도 못한다.


오랫동안 해치우고 싶었던것을 꺼내어 이제 막 마음을 바꾸기 시작하고 실천했을 뿐


해도해도 끝은 나는건가 싶고, 이러다 내가 지치는건가 싶지만, 시작하지 않았을 땐 이미 난 물건들에 지쳐있었다.


여전히 비우고 비워도 남겨진 멀쩡한 텀블러들, 유리잔, 머그컵, 커피잔들


여행 소품, 인테리어 소품, 오래된 액자, 오래된 립스틱들


아직도 내 앞에 놓여진 많은 물건들을 바라본다.



신혼 초, 머그컵이 없어 마트에서 하나씩 샀던 빨간색과 베이지 색의 둥그런 머그컵은 아직 비우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었을 때, 필요에 의해 골랐던 정말 역할에 충실했던 머그컵.


물건을 사고 모으고 물건이 나를 넘어 넘쳐 흘러질수록 내 삶을 복잡하게 만들어가는 것 같아


10년 전, 필요한 것만 존재하고 다소 허전해보였던 신혼집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 때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조금 더 간결하게 살아보려고 한다.


간결하게 살다보면 다른 의미있는 것들로 나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오늘도 비웁니다.


천천히 비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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