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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히지 않는 문

by iwasyourone

인스타그램을 지웠다. 조너선 하이트의 책 『불안 세대』를 읽고 나서였다. 인스타그램이 10대들의 불안과 우울을 크게 증가시켰다는데 앱을 지우면 정신적으로 좀더 건강해질 것 같았다. 과연 앱을 지우고 두 달 정도 지나자 스크린 타임이 하루 세 시간으로 줄고 그만큼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나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멍하게 스크롤을 넘기다 한두 시간이 지나버려 허무했던 순간들이 사라져서 좋았다.


문제는 그러고 나니 남편이 핸드폰을 보는 모습이 거슬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TV로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핸드폰으로 또 유튜브를 본다는 점이. 그동안은 인스타그램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 몰랐던 부분이었다. 시계 초침 소리가 시끄러우면 잠에 못 드는 나와 달리 남편은 소리에 별로 민감하지 않은 듯 했다. 그러면 거실로 나와 귀에 에어팟을 끼고 책을 읽었다. 결혼한 지 세 달 만에 이렇게 대화가 없어지는 건지 불안했지만 남편이 차지한 안방은 내겐 너무 시끄러웠다.


하루는 남편이 운전 중에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는 걸 못 보고 그냥 지나쳤다. 이전에도 한두 번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핸드폰이랑 TV를 동시에 보는 것에 꽂힌 내 눈에는 그의 주의가 산만해져서 운전에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그간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뇌는 멀티태스킹이 안 된다잖아. 그렇게 동시에 두 개를 보면 뇌가 얼마나 피곤하겠어. 계속 그러다 교통사고 날까봐 겁난다니까?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사방에서 소리가 나면 머리 아프다구.” 남편은 가만히 내 말을 듣고는 알겠다는 말만 했다. 기분이 상했냐고 묻는 내 말에 아니라고 했지만 어딘가 다운되어 보였다. 그는 말없이 TV로 넷플릭스를 켜더니 F1 다큐멘터리를 틀었다. 핸드폰은 머리맡에 내려둔 채였다.


분명히 걱정과 애정에서 한 말이었는데, 말수가 줄은 남편을 보면서 식은땀이 났다. 운전하다 보면 신호를 못 볼 수도 있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그를 기분 나쁘게 만든 것 같았다.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남편을 두고 거실로 나와 잔뜩 졸아든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내가 불만을 직접 표현한 적이 별로 없고 그럴 때마다 큰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대로 이혼을 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갔을 때였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정상이 아니었기에.


나는 불만을 꺼내면 큰 불화가 되는 집에서 자랐다. 아빠는 식구들에게 폭언을 일삼으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에는 민감했다. 외출하려는 그에게 자켓과 안에 입은 티셔츠 색이 안 어울리니 하나는 바꿔 입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면 너는 뭐 옷을 잘 입는 줄 아냐는 말이 크고 거칠게 돌아왔다. 이유없이 은은하게 늘 화나 있는 사람. 평생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임에도 스스로는 별로 민주적이지 못 했던 사람. 작년 겨울 계엄령이 터졌을 때 느꼈던 위압감과 불안감조차 내게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자기 맘에 안 들면 미친 짓하는 게 꼭 우리 아빠 같네…


결혼식 세 달 전 아빠가 갑자기 5천만원을 준다고 했다. 당신의 퇴직금에서 동생과 나의 결혼 자금을 미리 빼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나중에 팔 때는 동생에게 더 준다고 덧붙이신 말씀이 서운했다.


“너는 어학연수 갔다왔잖아. 영주는 안 다녀왔고.”


10여년 전 캐나다로 다녀왔던 어학연수는 내가 원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취업에 번번이 실패해 공모전과 대외활동을 하느라 바빴고 그와중에 유일하게 준비된 스펙이 영어였다. 나름의 계획을 착실히 이행해나가고 있었는데 아빠가 어학원도 비행기표도 홈스테이도 예약해 버렸다. 내 인생을 아빠 마음대로 할 거면 왜 낳았냐고 난리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연수 때문에 아파트값을 덜 준다고? 오래 전 느꼈던 서러움이 다시 복받친 나는 고민 끝에 아빠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 동안 모은 돈이 있어서 5천만 원은 안 주셔도 돼요. 그런데 어학연수는 제가 원해서 간 것도 아니고 아빠 욕심에 보내셨으면서 아파트값을 영주가 더 받는다니 좀 이상하네요.’


예상대로 아빠는 뒤집어졌다. 기껏 큰돈을 들여 외국에 보낸 자식에게 들은 말이니 어이가 없으셨을 것이다. 그는 너는 누굴 닮아 이렇게 이기적이냐고 하더니 나를 카톡에서 차단했고 며칠 뒤엔 주말에 본가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빌라는 문자를 보냈다. 무릎. 무릎이라니. 나에게 무릎이 있다는 사실과 마흔이 몇 년 안 남았다는 사실이 버겁게 느껴졌다. 결혼이고 뭐고 그냥 다 그만하고 싶었다. 그만 살고, 싶었다.


본가에 간 날 저녁은 아빠가 횡성에서 사온 한우를 구워먹고 내가 사 간 피칸파이를 디저트로 먹었다. 절연하고 싶을 만큼 미워도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사람이 가족일까. 주말 드라마가 끝나자 아빠는 자기에게 할 말이 있지 않냐고 물었다. 그래서 ‘아빠는 왜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것들을 당연하게 여겨? 영주가 공부 못 한 게 내 잘못이야?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 걔는 남자고 공무원이잖아. 딸이 임신하면 경력이 끊길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그리고 언제 영주랑 내가 돈 달라고 했어. 우리집은 남녀평등이라면서 먼저 나서서 아파트 팔면 똑같이 준다고 했던 사람은 아빠잖아!’ …라고는 말하지 못 했다. 소파에 앉은 채, 아빠에게 특화된 사회성으로 어학연수에서 배운 점들을 나열하며 용서를 구했다. 아빠는 당신도 나를 이기적이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다 컸어도 절대로 당신에게 대들어선 안 된다고도 했다. 불필요한 한마디를 덧붙이지 않곤 못 배기는 게 우리 집안의 고질병인 것 같았다. 물론 나도 그 일원이었고.


“아빠는 그냥 의견을 얘기해도 대든다고 하잖아. 그러는 아빠는 평생 가족들한테 막말해 놓고. 다들 아빠한테 평생 시달리면서 얼마나 병들었는지 알아?”


“야. 부모니까 자식한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기껏 화 좀 풀었더니 너 미쳤냐? 이 새끼가 어디 아빠한테 똑같이 하려고 들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드디어 찾은 문제집 별지에서 해설을 읽은 것 같았다. 부모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구나. 평생 그렇게 생각했던 거였구나. 왜 아빠가 내 상처에 대해서도 사과할 거라고 기대했을까. 대통령이라서 그래도 된다고 했던 사람과, 아빠를 만나기 전 에어백처럼 여기고 읽어둔 문장들이 떠올랐다.


“가슴 아프지만 부모님이 이제 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할 거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대부분 사과하지 않습니다. (중략) 당신에게 부모와 상처에 대해 화해하라고 조언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당신의 말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든 안 하든, 한번쯤 속마음을 표현한다는 그 자체가 당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오은영, 화해』


남편도 청소년 때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난 후 그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어머니의 언행에 대해 이야기를 해왔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사과를 하셨다고 했다. 사과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성별일까. 차이의 이유를 단정짓고 싶은 마음을 멈추며 나는 아빠는 후자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도 한 명의 인간일 뿐인데. 부모를 부모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대단하게 여겨온 사람은 오히려 나인 듯 했다. 사과를 받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사과를 안 받은 걸로도 괜찮았다. 아빠가 성숙한 척을 하지 않는 모습에 묘하게 안도했던 그날, 나는 아빠라는 숙주를 투투툭 튿어냈다.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은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야기하고 그 감정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한다. 내게 이런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죄 없는 남편을 자꾸 괴롭히지는 않을지. 없는 불만을 만들어내지는 않겠지만 남편과의 사이가 안 좋아질까봐 걱정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사는 집에서 나의 지분이 절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배려를 하는 게 아니라 눈치를 보고,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남편을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도 괜찮다.


거실에서 에어팟을 끼고 책을 읽고 있는데 문득 안방이 조용하다는 걸 느꼈다. 결혼 후 우리집 안방 문은 단 한 번도 닫힌 적이 없었으므로. 남편이 잠들었나 싶어 안방에 가보니 그도 에어팟을 끼고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남편이 쭉 뻗은 오른다리 옆쪽에 머리를 베고 누워 습관대로 핸드폰을 들었으나 접속할 인스타그램이 없었다. 핸드폰을 이불 위에 내려놓고 남편의 집중한 얼굴을 바라봤다. 곧 내 시선을 알아차린 남편이 에어팟을 양쪽 귀에서 뺐다. “오늘 회사 일은 어땠어? 저번에 말한 프로젝트는 잘 돼 가?” “다음 주에 런칭이라 좀 정신이 없네. 회의도 많고. 민초는 오늘 하루 어땠어?” 닫힌 문 없는 우리집에 우리의 말소리가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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