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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몸일 뿐

by iwasyourone

신혼여행을 떠나기 몇 주 전부터 고민했다. 가서 비키니를 입을 것인가, 입지 않을 것인가. 어렸을 때부터 통통했던 나는 평생 비키니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살았는데 이게 무슨 급속노화인지 서른이 넘어 소화 능력이 안 좋아지면서 살이 많이 빠지게 되었다. 결혼 준비를 한다고 PT를 받으며 뱃살까지 조금 빠지자 난생 처음으로 비키니를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여행에서 등이 다 보이는 티셔츠와 화려한 장식을 단 원피스를 입으려고 벼르던 중이었다.


하지만 비키니를 사려고 쇼핑 플랫폼에 들어가니 몇 분 안 지나 ‘그래, 내가 무슨 비키니야’라는 체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상품 정보 화면에서 육감적이고 군살 없는 몸매의 외국 언니들(물론 나보다 어릴 것이다)을 보니 역시 비키니는 내 옷이 아닌 것 같았다. 물속에서 나올 때 물살에 비키니가 가슴 위로 확 올라가는 상상, 후크나 끈이 풀리는 상상을 하면 아찔했다. 배뿐 아니라 가슴도 문제였네. 결국 수없는 터치 끝에 치마 형태로 된, 그야말로 안전한 수영복을 골랐다. 비키니를 입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흘려보내는 것 같아 아쉬웠지만 앞으로 수영복을 입을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신혼여행지인 스페인 마요르카에는 사진가 요시고의 대표 사진으로 유명한 해변, 칼로데스모로가 있다. 그러나 그곳은 사람도 많고 수영하기엔 좁아서 나와 남편은 20분을 더 달려 다른 해변으로 갔다. 분명 한국인이 올린 구글 리뷰를 참고해서 갔는데 도착한 해변에는 한국인은커녕 아시아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독일어와 스페인어, 영어가 섞여 들리는 해변에는 비키니를 입은 여자가 아주 많았다. 그리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아예 비키니를 벗고 있었다. 혹시 우리가 누드 비치에 왔나 비치 사인을 찾았지만 사인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누드 비치면 아래도 벗으려나? 실제로는 난생 처음 보는 다른 나라 여자들의 가슴은 모양이 다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의 가슴)에게 눈길을 꽤 자주 준 것 같은데 그들은 타인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저런 자유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나.


해변에 간 다음 날엔 요트 투어를 했다. 남편과 나 같은 부부를 비롯해 친구, 가족, 연인들이 모였다. 동양인들은 안쪽 그늘에, 서양인들은 차양이 없는 곳에 자리를 잡아 뚜렷한 대비를 이루었다. 요트는 한 시간 정도 이동한 곳에서 수영을 할 예정이었고 요트가 출발하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걸치고 있던 옷을 벗었다. 이곳에서는 황인도 백인도 비키니 차림이 많았다. 하지만 전날과 같이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 있었다. 요트 앞쪽에 앉은 할머니들이 전부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그래, 비키니는 수영복, 몸은 몸일 뿐이었다. 몸을 섹시하게 가꾸기보다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그냥, 그냥. 전날 왔어야 할 깨달음이 하루 늦게 와 있었다.


14시간을 날아간 나라에서 나는 사흘에 한번꼴로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 손에 깍지를 끼고 등 뒤로 쭈욱 당겨도 유두가 도드라지지 않는 니트를 입었을 때 말고, 얇은 옷에도 브래지어를 벗어보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노브라 표시를 내면 내 몸에 PC적인 의미가 덕지덕지 붙지만 그런 거 다 상관없이 브래지어는 불편하다. 노브라로 지내면서 나는 처음으로 소화 불량 없이 남편과 비슷한 양으로 먹었고 여전히 더웠지만 답답하진 않았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맨 몸 위에 두꺼운 니트를 더 자주 입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실은 스페인의 거리에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여자가 거의 없었다. 여기도 이거 아닌가 보다 싶어서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가슴에 안고 다녀야 했을 정도다. 이 글을 쓰면서 챗지피티에게 물어 보니 스페인도 일상복 문화와 해변 문화는 구분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도 유럽의 대도시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노브라 현상이 퍼지고 있다고. 어쩐지 신혼여행에서 다른 사람들 가슴만 쳐다보고 온 것 같지만 이제 나는 옷 표면 위로 유두가 톡 튀어나온 사람을 봐도 민망하진 않을 것 같다. 가슴은 가슴, 몸은 몸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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