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말해줘

by iwasyourone

오트우유가 들어간 라떼, 오트라떼를 즐겨 마신다. 확실히 그냥 우유가 들어간 기본 라떼보다 맛이 없지만 우유가 몸에 안 맞는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어쩔 수가 없다. 카페를 고를 때도 오트우유 옵션이 있는지 여부가 기준이 되는데 서울에는 아직 오트우유를 구비해 둔 카페가 많지 않다. 오트라떼가 있는 카페가 검색되면 일단 가고 본다. 맛은 그다음의 문제다.


그날 간 카페는 운좋게도 아주 맛있는 오트라떼를 팔았다. 다른 메뉴도 괜찮은지 손님이 많았다. 나는 좁고 기다란 원목 식탁에 앉아 1인용 소파 자리가 언제 빌까 열심히 곁눈질하면서 책을 보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내가 앉은 테이블의 건너편밖에 남은 자리가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남녀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았다. 편한 차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꾸민 차림도 아닌 그들을 보며 요즘 대학생들은 정말 세련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듯 보였는데 둘 다 살짝 인상을 쓰고 있어서 다툰 것처럼 보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앉은 그들은 식탁을 보고 나란히 앉았다가 곧 자세를 돌려 서로를 마주했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리 놀랍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게 여자 쪽에서 남자의 양손을 잡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기 시작한 이 장면은 너무도 놀라웠고 조금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작고 빠르게 이야기해서 대화 내용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자세만으로 울림은 충분했다. 두 남녀는 서로를 마주 보고 오른손으로 왼손,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은 채 서로의 말을 끊지 않고 정말 열심히 말하고 정말 열심히 들었다. 누구 하나 목소리가 커지는 사람도, 크게 한숨을 쉬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자세와 그런 대화에 익숙해 보였다. 서로 감정이 상할 때마다 저렇게 잘 화해해 왔겠지. 얼마나 오래된 사이일까. 주변에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들을 열심히 곁눈질하면서 책장을 읽지도 않고 천천히 넘겼다. 누군가를 똑바로 마주 보고 서운한 걸 이야기하는 경험이 있었나, 나는.


초코파이의 광고 멘트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에서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로 바뀐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는데 나는 여전히 속마음을 꺼내는데 서툴다. 상대에게 서운한 것을 혼자 잔뜩 쌓아두고는 만난 지 100일 만에 헤어지자 통보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뭐하는 건가 싶겠지만 나는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보다 그에게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는 게 더 어려웠다. 잠깐 속상하긴 해도 그냥 지나가면 별일이 아닌 게 되니까. 이미 마음이 상해서 별일이 아닌 게 아닌데도 그렇게 나의 감정을 무시하고, 털어놓으면 사라질 작은 일들을 삼켜서 자신을 좀먹게 만드는 오랜 버릇이 있었다.


얼마 전 본가에 내려갔을 때 아빠가 동생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까 점심시간에 잠깐 집에 들렀을 때 아픈 엄마가 청소기를 밀고 있는데 동생이 방에서 가만히 있었다는 게 이유였다.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실제 상황:

(점심시간)

아빠: 여보, 나 왔어.

엄마: 지이이이이잉. (청소기를 밀며) 응. 냉장고에 반찬 꺼내서 밥 챙겨 먹어.

아빠: 아니 영주는 뭐하고 당신이 청소기를 밀고 있어.

엄마: 괜찮아. 몸 좀 괜찮아져서 내가 하는 거야.

아빠: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애 키워봤자 소용없어. 어휴, 속 터져.


상상:

(점심시간)

아빠: 여보, 나 왔어.

엄마: 지이이이이잉. (청소기를 밀며) 응. 냉장고에 반찬 꺼내서 밥 챙겨 먹어.

아빠: 아니 영주는 뭐하고 당신이 청소기를 밀고 있어. (영주 방 두들기며) 똑똑. 영주야. 나와서 청소기 좀 밀어.

영주: 네? 아, 네!

엄마: 내가 여기까지 했으니까 여기부터 네 방까지 하면 돼. 고마워~.



바로 이야기하면 해결됐을 일을 넘어가 놓고 나중에 크게 화를 내는 아빠를 보니 내 성격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집은 네 식구 모두 평소에는 서운한 걸 말 안 하고 꾹 삼키고 있다가 돌아가면서 한 명씩 폭발한 역사가 있다. 마음이 상하면 담아두지 말고 제때 말해 털어버리면 좋을 텐데. 쟤는, 당신은 원래 저렇다 말이 안 통한다 넘겨짚지 말고. 서로에게 좀 더 기대하고 기대고 그렇게 가슴에 골병 없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카페에서 본 커플은 어떤 엄마아빠를 두었을까 그려 보다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알았으니, 이제 바뀌고 싶으니 바꾸면 되니까. 누군가의 두 손을 잡을 내 두 손을 동그랗게 만들어 힘껏 쥐어본다. 조금은 준비가 된 것 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몸은 몸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