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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wasyourone

축하해. 민초야. 그 동안 열심히 했지. 고생 많았어. 인생은 가끔 바짝 최선을 다해야 하는 시기가 있고 방금 그 중 가장 강도 높은 시기가 끝난 거야. 수고했다, 정말.


너는 역시 실전에 강해서 여태까지 본 모의고사 중 제일 높은 점수를 받을 거야. 수능을 잘 봤다고도 볼 수 있겠지. 그래도 서울의 괜찮은 대학을 가기에는 애매해서 서울에 가겠다고 하면 아빠는 네 주제를 알라는 말을 할 거야. 너는 서울에 가기 위해 공부를 했으니 그 말이 많이 서럽겠지. 너는 너대로 서울에 안 보내줄 거면 왜 그렇게 공부를 시킨 거냐며 황당할 거야. 하지만 아빠는 너의 학비를 대야 하는데 너는 그 사실을 당연히 여길 만큼 싸가지가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보탬이 되겠다는, 장학금을 타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해. 결국 아빠는 너를 위해 무리를 하실 거야.


너는 어려서 외국 한번 나가지 않았는데도 영어를 곧잘 했고 학창시절 내내 영어 시험이 끝나면 반 애들이 몰려드는 아이였지. 대학에 와서는 원어민처럼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들이 수두룩 빽빽할 거야. 백인 교수님과 함께 영어로 진행되는 첫 영어 수업에서 너는 바로 입을 꾹 닫게 될 거야. 평생 가장 좋아하는 수업이었는데 이제 영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될 거고 A를 받지도 못할 거야. 학점은 성실함의 영역인데도. 아직까지 성실함이 통하는 세계에 산다는 것도 알지 못하겠지.


첫 미팅에서 너는 첫사랑의 정의를 바꾸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그는 너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고 너를 보며 더 큰 꿈을 꿀 거야. 그리고 그 꿈 때문에 너를 한국을 떠날 거야. 너는 그를 그리다 수많은 사랑 노래와 영화를 이해하게 될 거야. 어느 겨울에는 그가 준 목걸이에 달린 참이 무거워서 방구석에 주저앉아 엉엉 울게 될 거야. 그 목걸이는 네 손으로 끊어질 거야. 그 후로도 네가 이별에 대처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을 거고.


일본, 캐나다, 영국, 프랑스, 중국, 미국, 베트남, 홍콩,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게 될 거야. 상상도 못했겠지만! 캐나다에서는 어학연수로 1년이나 지내게 될 거야. 너는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한국이 다르게 보이는 게 좋아서 또다시 떠나게 될 거야. 캐나다에서 사귄 외국 친구들은 평생 지구 곳곳에서 소중한 여행 메이트가 되어 줄 거야. 네 친구 한나도 미국에서 살게 될 텐데 한나의 기도가 이루어진 거니 너무 슬퍼 말렴.


열심히 하는 게 매번 통하지 않는다는 인생의 쓴맛은 취업을 준비하면서 알게 될 거야. 단 한 번도 회사원을 꿈꿔보지 않았다는 것, 뉴스를 별로 보지 않았다는 것, 너는 오로지 네 정원의 우물만 보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될 거야. 네가 네 주제를 모르고 살아왔다고 아주 오랜만에 아빠의 말이 다시 떠오를 거야. 처음으로 아빠가 맞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거야.


힘들게 들어간 첫 직장에서 너는 사장님에게 어리고 예뻐서 뽑혔다는 말을 듣게 될 거야. 그리고 네 발로 그곳에서 나올 거야. 다음 회사는 오 년이나 있을 거지만 역시나 윗사람들이 싫어서 이직을 할 거야. 설렘으로 도착한 스타트업에서는 역대 최악의 리더들이 그득할 거야. 하지만 좋은 동료들도 많이 만날 거야. 그들과 너는 서로와 공황 장애를 얻을 거야. 출근길 지하철에서 쓰러질 거야. 너는 나중에 그들을 만날 때마다 울어서 놀림을 받을 거야.


그쯤 비트코인이 세상을 휩쓸고 너는 코인에 한 푼도 투자하지 않았지만 코인 때문에 또다시 주저앉을 거야. 네 곁에 있는 사람도 주제를 모르는 게 아닐까, 너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깃들어 있을 거야. 주제를 모르는 사람들이 서울에 와 사랑이라는 걸 해서 불행해지는 게 아닐까 두려워 할 거야. 이별을 말하며 너는 너무 아파서 사랑하는 능력을 크게 한번 잃어버릴 거야. 그렇지만 걱정 마. 곧 되찾을 거니까.


스타트업에서 나오면서 너는 오랜만에 길게 쉴 수 있을 거야. 온 세계가 전염병에 감염되어 비행기를 못 타는 대신 방 안에서 책과 영화를 보면서 지낼 거야. 일을 안 하면 심심할 줄 알았던 너는 평생 백수를 할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을 안고 새로운 회사에 들어갈 거야. 그리고 드디어 존경할 만한 윗사람들을 만날 거야. 동료를 믿고 기다려주는 너그럽고 자상한 사람들을. 너는 어쩌면 그 회사에서 몇십 년을 일할지도 모른다고 또 마음을 전부 내주어 버려. 하지만 준 것은 마음뿐이 아니어서 너는 과장이 되고 팀장이 되고 스타트업에서 받던 연봉의 두 배가 넘는 대우를 받지. 업무평가에서도 최고 점수인 E를 받을 거야. 네가 어느샌가 많이 성장해 있음을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네 온몸과 마음에 사랑을 부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그 사람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행복에 겨워 운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서 걷다 말고 눈물을 쏟고 말 거야. 그 밤거리 위에서 네 인생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게 될 거야. “일도 사랑도 놓치고 싶지 않아.” 욕심인 것 같아서 잠시 망설이겠지만 절대 욕심이 아니라는 것도 너는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될 거야. 네 인생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불행은 찾으려 해도 없을 거고 무엇보다 이제 너는 불행이 별로 무섭지도 않을 거야.


한번쯤 너는 다시 물을 거야. 주제도 모르고 서울에 있는 게 맞느냐고. 주제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주제를 안다는 것도 모른다는 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빠의 말이 너에게 자꾸, 자꾸만 남는다고. 하지만 답을 듣자 마자 너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거야. 네가 답을 인정하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다른 사람이 너에게 그 말을 해준 거야. 너는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네 주제를 알게 된 거야. 제대로 들었으니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팔뚝에 문신은 안할 거야.


E. Excell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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