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커리어 : 대기업편
"엄마는 청소하는 사람이지?"
다섯 살 아이의 말이다. 아이 눈에 엄마가 집을 쓸고 닦는 모습이 퍽 유난스러워 보였나 보다.
갑자기 후회가 밀려온다. 재작년 퇴직서를 제출할 때 사원증도 함께 반납했다. 사원증을 반납하지 않으면 퇴직금에서 2만원을 제한다고 했다. '미련' 따위에 굳이 2만원을 지불할 가치가 있을까? 훗날 기념이 될 것도 같았지만, 미련스러운 건 딱 질색이니까. 하지만 막상 아이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사원증을 반납한 게 후회가 되었다.
십 년 동안 네 번의 입사와 네 번의 퇴사를 경험했다. 마지막 7년을 몸 담았던 곳은 경기도 수원에 본사를 둔 대기업이다. "경영지원 지원자는 오른쪽에 영업 지원자는 왼쪽에 앉으세요." 면접 당일 인사담당자가 한 이 말 때문에 온 몸에 식은땀이 났다. 내가 어느 직군에 지원했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나는 것이었다. 물어보면 감점이 될 것 같았다. 우선은 잠자코 있자. PT면접, 토론면접, 임원면접 세 가지를 봤는데 PT면접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지원한 직군에 따라 풀어야 할 질문지가 달랐기 때문이다. 난 떨리는 마음으로 영업직군의 질문지를 받아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영업에 지원한 전지혜 입니다." "전지혜씨는 여기 보니 경영지원에 지원했는데, 왜 영업이라고 소개했나요?" 아차 싶었지만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다. 난 조금 뻔뻔하게 답했다. "업무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경영지원보다 영업에 더 적합한 인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신문에서 처음 본 'Golden Price'라는 용어를 써서 발표를 했더니 다들 내가 영업에 적합한 인재라는 데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는 그렇게 위기를 넘기고 공채 신입사원으로 대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신입사원 때부터 해외의 법인을 하나 맡아 매출을 관리했다. 맨 처음 맡은 곳은 중국의 '동관법인' 이었다. 매달 혼자 열흘 이상씩 동관으로 출장을 나갔다. 난 항상 동관빈관 이라는 오래 된 호텔에 투숙했다. 말이 호텔이지 옛날 중국영화 전투신에 꼭 나오는 2층짜리 객잔에 요즘 가구들만 얹어 놓은 느낌이었다. 방에서는 늘 쾌쾌한 담배냄새가 났고, 옆 방에서 기침을 하면 너무 크게 들려 자주 깜짝 놀랐다. 일과를 마치면 법인사람들과 중국식당의 원형 테이블에 둘러 앉아 기싸움을 한다. 백주와 맥주를 혼합한 폭탄주가 눈 앞에 왔다 갔다 한다. 먼저 취하면 지는 것이다. 나는 늘 지지 않은 모습으로 동관빈관에 무사히 도착했다. 다만 2층 내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로비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였다-는 '네 발 인간'으로 변신했다. 긴장이 풀려 취기가 확 올라 온 데다 오줌보도 터질 것 같아 두 발로 걸어 올라가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까.
출장지에서 낙은 현지의 그림가게들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동관빈관 앞에는 화랑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의 화풍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가게는 화가아저씨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갈 때마다 들러 안부를 묻고 구경을 하고 그림을 샀다. 나중에는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함께 밥도 먹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따라갔다고 주재원에게 엄청 혼났지만, 내 입장에서는 폭탄주가 난무하는 회식자리가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한번은 술에 취해 화랑에 들렀다 가진 돈을 전부 털어 그림을 샀다. 출장기간이 한참 남았는데 환전해 온 돈을 다 써버려 다음날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 당장 출근길에 쓸 택시비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다른 의미의 아찔함을 느낀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결국 내 자리 따위는 어디에도 없을 것만 같은 막막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결국 나도 청소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아니다. 걱정과 한탄은 나중으로 미뤄 놓기로 한다. 아이들을 보살피며 작은 것 하나에도 벌벌 떨다 보니 부쩍 소심해진 것도 같다.
신신당부해 놓았으니 아이가 다시는 내게 '청소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네 군데의 회사 중 이제 하나 떠올렸을 뿐인데 자존감이 부쩍 높아졌다. 그래, 나 이런 사람이었지! 기분이 풀리자 이내 아이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얼마 전, 절대 퇴사하지 않을 것 같던 친구가 퇴사 소식을 전해왔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돌봐 주던 육아도우미가 그만뒀고 다른 사람을 고용했는데 또 그만뒀고 그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자 결국 자신이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떤 위로도 무용하다는 걸 잘 알기에 그의 얘기를 묵묵히 들어만 주었다. 그 친구도 회사일을 똑 부러지게 하던 실력으로 집안일과 육아를 퍽이나 열심히 해 내겠지. 부디 그가 아이들 눈에 '청소하는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길 바라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