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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은 왜?

내 인생의 책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걸 다시 읽으며 결심을 굳히기 시작했다. 왜 독서모임을 하려는 것인지. 얼마나 할 말이 많은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은 어느 구절에서 감정이 폭발하는지. 나와 얼마나 다르고 또 같은지. 글 속에 인용된 책들은 또 어떻게 보았는지. 독후감상문을 쓰는 일이 이리 즐거울 수가 있다니.



<책은 도끼다>를 읽고


-(내 감상) 수없이 많은 책을 그냥 읽었다. 도끼의 칼날을 갈지 않아 늘 졸려하면서. 한편으로 내가 기특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빈한한 기억력에 낙심해서 일찍 책장 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면 도끼는 쓰지도 못하고 또한 녹슬어 버렸을 것이다. 도끼 자루를 썩히지 않은 내 인내심이 장하다. 지금이라도 힘껏 내리치자. 오래 묵은 겉껍질 속에 숨어있던 속살의 촉수는 더없이 예민하리라. 마음껏 드러내서 켜켜이 숨은 향기를 맛보고 싶다. 문을 활짝 열고 남은 날들을 즐기리라.


인간에게는 공유의 본능이 있다. 울림을 공유하고 싶다.

-책 읽기 모임에 대한 내 생각도 같은 지점에 있다. 늦은 깨달음이지만 방황은 그만큼 깊었다. 그래서 그 울림을 더 공유하고 싶다. 노파심이겠지만, 그걸 모르고 지낸 시절이 스스로 안타까워서, 다른 사람에게는 지름길을 알려주고 싶다. 얼마나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인지는 듣는 사람의 몫이다.


제 1강 시작은 울림이다.

다독보다 한 권이라도 깊이 있게 읽어라. 한 문장 한 문장 꼭꼭 눌러 읽는 습관을 들이라. 한 권의 책 읽기가 끝나면 따로 옮겨 놓아라.

-이것을 실천하느라 요즘 많이 바쁘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활자매체에 똑같이 적용된다. 신문의 짧은 글도 꼭꼭 씹으며 본다.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저장되는 기억의 양이다. 물론 모두 기억되는 건 아니지만 이전보다 엄청난 잔상이 남는다.


창의적인 생각은 뒤집어 보기이다. 지식이 아니라 감성으로 보기이다. 창의성은 상품화하거나 규정화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디어는 총체적으로 나오지 도식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도식적이지 않으면 어려우니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굳이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도식화된 독서를 참을 수 없었다. 성공하는 비결 몇 가지 같은. 요새는 강의를 듣는 것도 좀 버겁다. 책은 내 마음대로 골라 읽을 수 있지만 강의는 어쩔 수 없는 수동태이니까. 학교 공부가 재미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선생님이 좋아하는 학생이 너무 일찍 되었고 그 이후에는 흥미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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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풍요는 감상의 폭이다. 감상은 훈련이 필요하다. 행복은 순간에 있다.

-내가 대학 총장이라면 눈 사용법을 가르치겠다는 헬렌 켈러의 말 정말 동감한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나는 볼 것이 많지 않았기에 정말 많은 것을 기억하는 것 같다. 문명의 이기를 하나씩 볼 때마다 얼마나 경이의 눈초리로 보았던가. 그 경탄이 나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충격과 감동하는 것이다.


제 2강 김훈의 힘 들여다보기

김훈의 글은 형용사나 부사를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사실만 불러내서 정서를 전달하는데, 생각보다 그 힘이 크다.

_김훈이 이상 문학상을 받은 <화장>의 수상 소감에서 보면 이런 문장을 쓰게 된 계기가 소개되어 있다. 대학시절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고 사실만 기록한 문장의 엄정함을 보았단다. 그리고 일간지 기자로 보낸 영향도 크리라. 신문 기사라는 것이 6하 원칙에 따라 쓰는 글이지 않는가? 원래 어떤 수식어보다는 사실 보도에 엄격해야 하니 객관성을 흐리게 하는 미사여구를 멀리 할 수밖에. 무엇보다 김훈이라는 사람의 생태가 대쪽 같기도 하지 않을까? 눈을 똑바로 뜨고 찍은 사진을 보면 장식이 빌붙을 데가 없어 보인다. 삶은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간다고 우리 동네에서는 평하는데, 그런 사람 같다 내 눈에는. 그래서 인간미는 좀 떨어져 보인다. 꽃밭 같은 문단에 맹수가 나타났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 없을 만큼.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러운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꽃 문득 추락해 버린다.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산수유는 노을이 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미나리는 전령사이자 시간의 변곡점이 된다. 자작나무 숲이 흔들리는 모습은 잘 웃는 젊은 여자 같다.

-김훈의 글을 보고 나서 꽃을 보는 눈이 열린다. 이제 동백도 매화도 더욱 산수유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집 옆 자작나무를 지날 때마다, 잘 웃는 여자가 생각난다.


미국의 전 국토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망이 생긴 덕분에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대륙을 횡단할 수 있게 되었다. 속독도 마찬가지이다. 목적지에 빨리 닿기는 하지만 관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책은 왜 읽고 음악은 왜 듣는가? 삶의 위안이 되니까. 그리고 새로운 삶의 촉수를 만들어 준다. 나의 생각과 같은 접점을 발견하는 것도 독서의 기쁨 중의 하나이다.

-질문의 힘. 책은 왜 읽고, 음악은 왜 듣는가? 그 말이 귀에 들어와야 생각이 열린다.


제 3강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통찰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아주 쿨하고 태연해질 수 있어요.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좋아하는 게 중요하지 않고 저 사람이 좋아해 줄까 가 중요해집니다. 관점이 모두 상대로 돌아서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방향일 뿐 공간이 아니다.

-결혼은 방향이면서 또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그게 공간을 지칭하는 게 아닐까.


우리 모두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해서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잘 간파한 문장이다. 심지어 나는 이름을 가지고도 온갖 상상을 하며 내 사랑을 합리화시키기도 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가들이 사랑에 잘 빠지는 이유도 이점에 기인하리라. 두 번째 문장은 자기애의 한 일면을 말한다. 불쌍한 나를 위로하는 사랑, 그게 자기애이다.


플라톤은 ‘예술보다 삶이 먼저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생활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생활이 예술을 모방한다’ 앤디 워홀은 ‘예술이 생활이고, 생활이 예술이다.’

-모두 관점이 다른 얘기이다. 대학 졸업 무렵 나는 플라톤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때 나는 생활을 너무 몰랐다. 더 많은 경험이 쌓여야 예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활에만 젖어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그만 예술의 감각을 잃고 만다. 복귀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생활이 예술을 모방하는 게 현대를 잘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진기의 등장으로 예술이 생활을 모방하던 시대를 끝났다. 단순한 되풀이에서 생활의 활력소를 찾기 위해 우리는 예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앤 디위 홀은 그러나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고 누구든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열린 예술가의 바람직한 시각이다. 워홀의 그 시선은 사랑의 마음과 일맥상통한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고 액자에 넣는 순간 예술이 되듯 우리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김춘수의 ‘꽃’이 여기서 핀다.


삶, 즉 사람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삶이다. 내가 가진 것을 즐겁게 나누고, 누군가 그걸 통해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고, 그도 또한 누군가와 내가 느낀 기쁨을 공유했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일을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소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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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이다. 주변에 널려있는 행복을 발견하면 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음악을 감상하고, 그림을 보러 다니는 일도 모두 행복을 발견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 우리는 발품을 팔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잘 감상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행복을 줍는 연습의 시간이다. 내 딸의 재수 시절, 우리는 자주 그 연습을 했다. 아이는 그 시간을 통해 어두운 터널을 통과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나면 회로가 재설정되는 거죠. 책은 그만의 발달한 감수성으로 우리를 예민하게 하고 우리의 숨겨진 촉각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뭔가를 느리게 천천히 할 때 생기는 이점은 그 도중에 세상이 재미있어진다.

-어제 그 드샌 봄추위를 무릅쓰고 정독 도서관에 갔다. 찾는 책은 모두 대출 중이고, 그냥 서고를 서성이다, 조은의 소설을 발견했다. 시를 잘 쓰는 예민한 작가라는 선입견이 있어 그 책을 빌렸다. 그리고 어젯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분명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도 자전적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과도한 감정이입이 오히려 독서를 방해한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난독증이 생길 만큼 눈이 내용을 앞질러 튀었다. 그녀의 예민한 촉수를 더듬는 일이 숨을 멎게 할 지경이었다. 아이들이 나가는 것도 모르고 오전을 그녀와 함께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시집을 다시 읽고 싶어 졌다. 오늘 읽어야 할 많은 책들을 제치고, 그 책 <빈방들>이 나의 하루 회로를 재설정한 셈이다.


말로 그림을 그려보라. 언어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언어를 공격하는 것뿐이다. 상투적으로 하지 말고 다르게 얘기해야 한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목표로 삼는 것은 온몸이 촉수인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늘 하는 말이다. 그냥 좋다고 하지 말고 왜 좋은지 어떻게 좋은지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라. 그래도 감정이입이 안되면 돈을 쓰라고 한다. 그러면 모두 눈을 반짝이며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적어도 최소한의 불씨 노릇은 한다. 그나마 돈이 있어야 그 가정도 먹히긴 하지만. 그리고 말로 표현할 때 죽은 표현에 자기 생각을 가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온몸이 촉수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행복도 일종의 연습이 필요하다.


제 4강 <고은의 낭만에 취하다>

-고은의 시에서 나는 늘 진정성을 의심했다. 사물을 보는 날카로운 눈이나 표현,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각, 어느 하나 빠지는 건 없다. 현실 참여 의식도 높아서 그쪽 활동도 꽤 활발하다. 해마다 노벨문학상을 후보로 거론되는 걸 보면 사회적 인식도 어느 정도 합일점을 이루고 있나 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 번도 정말 그렇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시를 한 번도 진심으로 읽은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어느 것 하나 빠진 것은 없지만 마지막 2%가 부족한 시이다. 내게는 그게 진정성의 결여로 보였다.

<순간의 꽃>을 보았다. 정말 하이쿠 같아서 아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절묘한 표현도 많다. 그러나 아직 내게는 머리로 읽는 시이다. 가슴을 울리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 그 선입견을 바꾸려 노력했으나 여전히 저만치에 서있다. 경향신문에서 연재된 자전적인 글을 보면서도 그런 불만이 해소되지 않았다. 무엇이든 다 안다는 태도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선명한 기억력을 들으면 정말 말문이 막힌다. 아이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리 똑 부러지게 기억할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했다는 것까지. 마치 자신이 천재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기를 쓰고 기억을 짜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일제 시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주변 삼국의 정세까지 알았다는 게 가능한가. 요즘 같은 미디어 시대에도 초등학생이 그런 걸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절묘한 표현은 정말 많다. 소름 끼치게 세상을 뚫어보는 눈은 인정한다. 단지 언어의 마술사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술사는 없는 새를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눈속임을 통해 우리를 잠시 기만하는 것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이다. 모든 문인이 도덕적일 필요는 없지만, 감정은 솔직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진정성을 느낀다.


계몽의 핵심은 더 잘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일깨워줘야 한다는 것이죠. 즉 자기들의 문명이 더 우월하다고 전제하는 것이지요.

-옳고 그름의 문제에 얼마나 오래 매달려 있었던가? 그걸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도 갖고 있었다.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든지.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로디>라는 책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이런 시각을 뒤집어 주는 것이다. 나도 오랫동안 이런 유치한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삼각형이 신을 만들면 신도 삼각형 모양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주인이라는 생각이 큰 착각인 거지요.

-발상의 전환이 신선하다. 누구 입장에서 볼 것인가? 구태의연함을 벗어보자. 인간이 신을 만들었기에 신도 인간이다. 지극히 감정적이고, 불완전한 존재, 어디 위대함이 깃들 곳이 있겠는가. 그러니 별것 아니다.


제 5강 햇살의 철학, 지중해의 문학

그리스 햇살을 조각을 발전시키는 햇살이라는 것이죠. 매일 아주 정확하게 떨어지는 햇살에 모든 그림자의 각이 서고 사물의 입체감이 살기 때문에 조각이 발전했다는 뜻입니다.

-조각은 우리에게 좀 낯선 장르이다. 왜 저렇게 많은 조각품을 만들었을까. 유럽 여행을 다니며 박물관 화랑의 꽉 채운 조각들을 보며 생긴 의문이었다. 우리가 불상을 만들듯이 그들은 그들의 신을 형상화 한 것이다. 불상은 신앙의 대상으로 파악하면서 서양 조각을 그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늘 예술로만 인식했으니 관점의 차이가 엄청나다. 예술은 서양에서 오고, 동양은 신앙의 대상을 만든다. 이 뿌리 깊은 우월적 사대주의의 시각이라니.


알제는 해가 비칠 때면 사랑에 떨고 밤이면 사랑에 혼절한다. 누가 그랬던가, 영원한 사랑이라고? 영원한 것은 오직 돌과 청동과 푸른 하늘뿐이다.

-사랑에는 두 가지 감정이 확실히 혼재한다. 떨림과 혼절, 순차적으로 왔다가 어느 순간 둘 다 자취를 감춘다. 떨림이 막 우리를 방문했을 때 그 순간을 즐기라는 것이다. 혼절할 만큼 뜨겁게 몰입하고, 곧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니. 그리고 우리 가슴은 돌이 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이 돌이란다. 결국 돌이 이긴단다. 에이 돌 같은 놈, 이 돌 대가리, 그래도 돌은 영원하단다.


많은 사람들의 이 꿈의 창문을 열지 못하고 찬란한 순간을 놓치고 살고 있다. 우리는 곧 사라질 것이라는 걸 까맣게 잊은 채.

-정독을 하는 일도 이 꿈의 창문을 여는 행위이다.


일요일 오후 언뜻 해가 질 무렵의 먹먹함과 허무함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합니다. 감미로운 기쁨이 있는 것처럼 뜻 모를 슬픔이 문득 찾아오는 것, 이렇게 삶이라는 건 열린 창문 사이로 밀려드는 햇살처럼, 순간의 기쁨, 그리고 나머지의 슬픔으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해질 무렵의 스산함,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걸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간이다.


인도를 다녀와서야 비로소 나는 ‘꿈’이라는 말의 참다운 규모를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요즘 나는 꿈이 인도의 은유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호사와 굶주림의 공존을 그들은 떳떳이 전시하는 듯하다. 그 엄청나고 태연한 가난.

-인도는 모든 현상과 사물이 혼재하는 곳이다. 마치 우리의 꿈속 세계처럼. 어떤 논리로도 이해될 수 없지만,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 곳이다. 내게는 황홀한 곳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세게, 꿈이 인도의 은유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래서 아직 인도 여행을 감행하지 못한다. 내 꿈속으로 들어가는 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삶은 이별의 연습이다. 세상에서 마지막 보게 될 얼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한 떨기의 빛, 여행은 우리의 삶이 그리움인 것을 가르쳐준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오던 날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혼자 부산에서 보낸 그 외로운 시간들, 아무도 모른 곳에 방치된 중고등 학교 시절, 그리고 엄청난 충격을 체험한 대학 시절까지. 이별은 늘 연습하지만 겪을 때마다 새롭다. 우리의 삶이 그리움의 연속이기에 나는 늘 정처 없다. 누구에게 건, 어디에서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너무 일찍 터득한 사람의 비정함이 내 몸을 감싸고 있다. 이르게 찾아온 추위처럼 알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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