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다. 지난 4월의 단발적인 봄비 이후에 처음이 아닐까 싶다. 얼마나 땅이 메마른지. 화단의 흙을 만질 때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사실 서울에서야 언제나 물을 줄 수는 있다.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물뿌리개로 뿌려댔으니. 어느 날 TV에서 쩍쩍 갈라진 저수지며 논을 비추는데, 양심이 찔리기 시작했다. 혼자 즐기는 꽃구경에 물을 이리 낭비해도 될까? 나라도 참아야 하는 건 아닐까?
옛 문헌을 보면 임금이 기우제를 지낸다는 기록이 자주 눈에 뜨인다. 볼 때마다 사실 좀 가소로웠다. 빈다고 비가 내릴까? 약간의 빈정거림이 첫 번째이고. 뒤이어 따르는 하늘이 임금의 정성에 감동해 비를 내렸다는 걸 보면 좀 뜨악해진다 할까.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임금의 신령스러운 능력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 대해 가여운 마음과 더불어. 강우가 어떤 원리로 진행되는지 익히 알고 있는 현대인의 머리로 보는 관점이었다.
이번 봄은 이런 내 관점에 자그마한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으니. 정말 기우제를 지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심정이 되었다 할까. 꽃을 즐기기는 하지만 성실한 재배자는 결코 아니어서 물 주기는 기분 내키는 대로가 대부분. 잊고 있다가 불현듯 걸신들린 사람처럼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같은 오랜 가뭄에는 이게 통하지 않은 것이다. 산발적인 애정 행위만으로 꽃의 아름다움을 탐하려 했느냐고. 누가 준엄하게 꾸짖는 듯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내 얘기를 다 쓰면 대하소설 한 편은 족히 될 것이라고. 뭐 그만큼은 아니지만 지난겨울부터 시작된 책방 도전기를 엮으면 중편 소설쯤은 된다. 세상살이는 쉼 없는 반복 같지만 무슨 일인가를 시작하고 보면 매번 도전에 직면하니. 모두 처음 해 보는 낯선 일인 것이다.
하물며 책방을 여는 일이라니. 그간의 내 경력은 어떤 조직에 들어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기껏 도전한 것이라면 ‘독서모임’의 프로그램을 스스로 짜거나 ‘제주한 달 살기’ 정도랄까. 그마저 나는 몸만 갔지 장소는 다 정해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내용만 준비한 것이었다.
책방 열기는 처음으로 형식을 갖추는 일이라 할까? 그것도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감행한. 정말 단순히 어떤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무슨 집을 짓는 일도 아니고 작은 책방 여는 것을 뭐 그리 거창하게 말하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만. 일이 진행될수록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 환상 속에는 ‘조용하고 아담하고 깔끔한 장소’가 많지만 현실에서 찾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우리 모두는 조금씩 다른 추상적인 개념을 갖고 있지 않은가. ‘아담’의 크기를 몇 평으로 조율하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부동산 순례를 신선한 체험으로 즐거워하다가 차츰 두려움으로 변했다. 생각이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겪는 괴로움이라니. 책방 일로 외출했다 돌아온 날이면,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아 밤에는 오래 뒤척였고, 어쩌다 잠이 깨면 정신이 번쩍 들곤 했으니. 그때 나를 괴롭힌 생각은 ‘정말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와 싸우는 일이었다. 하루하루 무슨 일인가를 하고 다녔는데, 근원적인 질문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뿌연 안갯속을 무얼 찾는지도 모르고 종일 헤매고 다니는 심정이랄까.
그러다 한참 지난 후에 통탄할 일을 만난 것이다. 제일 처음 본 서촌의 그 공간이 정말 괜찮았다는 깨달음이었으니. 돌아다니며 보니까 입지며 형태며 조건이 나무랄 것이 없더라는. 갑자기 조급해지기 시작했으니. 차선으로 내가 놓친 곳을 없을까? 의문이 생긴 것이다. 이미 빠져나온 골목을 다시 헤집고 다니며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마침 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큰길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 많이 들어가지는 않고, 공간 활용도가 높으며 가격도 비교적 맞는다는 생각이. 후다닥 마치 홀린 듯 누하동 그 집을 계약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 집 대문이었으니. 누가 믿으려나 모르겠다. 아니 그 문의 창살이 나를 끌어들였다. 쇠로 만든 붉은 가지에 드문드문 꽃이 핀 창살이라니. 꽃은 짱짱한데, 문틀은 또 어찌나 고색창연한지. 여기저기 벗겨진 페인트가, 좀 삐걱대는 자물쇠가 오히려 연륜을 말해준 듯했으니. 그곳이라면 내 꿈을 부릴 수 있겠다는 환상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가격에 비해서 넓기도 했지만, 조금 파격적인 실내 구조가 결정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유명 조각가의 작업실이었다는 그 말에 홀렸을까.
계약을 하고 한 동안 친구들에게 자랑질을 했다. 내가 마련한 곳이 얼마나 근사한 곳인지 핏대를 올리며. 다들 고개를 끄덕여주었으니 나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본격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공간을 다듬는 과정 말이다. 용도에 맞게 건물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복잡한 공정인지. 처음에 보이지 않던 건물의 결함도 눈에 뜨였으니. 다닥다닥 붙은 구조 탓에 실내가 많이 어둡다는 것과 토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벽을 허물고 세우는 작업도 필요했다. 물론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좋은 인테리어 사무실을 찾아갔다면 일은 간단하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돈도 없었지만, 그것마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갖고 있었으니. 준비가 갑절은 고달파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개점 날짜를 늦게 잡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구체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이 다가올수록 머릿속이 엉기기 시작했으니. 서가를 어찌 배치해야 할지, 조명은 어떤 것을 어느 방향으로 달아야 하는지? 심지어 책을 얼마나 들여놓아야 할지도 오리무중이 되어갔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시간을 책방에 있어야 한다는 부담은 어찌 극복할 것인가. 불안감이 상승하자 의견을 청취한다는 핑계를 대며 쓸데없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정리는커녕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느낌이 들었으니. 정말 중요한 일을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해야 할까에 대한 의문이 아직 확신으로 바뀌지 않은 것 말이다. 그러니 조언이 무슨 소용이며, 무슨 근거로 선택을 감행한단 말인가.
한참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해결되었으니. 집주인이 본래의 계약과 어긋나는 사정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원하면 계약을 해지해 주겠다는 게 아닌가? 내게는 그리 불리한 사항도 아니어서 강행해도 되는 조건이었지만, 정중하게 그럼 그러자며 물러났다. 솔직히 말하면 얼마나 후련했는지.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제 이 부담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니. 나는 다시 자유다. 계약금이 통장에 되돌아온 순간 나는 수없이 지우고 그렸던 서가 배치도를 조용히 접으며 다짐했다. 이쯤에서 그만 꿈도 접자. 역시 책방은 내게 너무 무리인가 보다.
기분 좋은 해방감이 얼마나 갔을 것 같은가? 봄이 싱그러운 이유는 초록의 잎들이 팔랑이기 때문이듯이. 말라가는 화단을 보며 늦은 봄날을 보내는 감상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니 얼마나 한가롭고 좋으냐고 수없이 되뇌어 보았지만. 생기는 쉬 돌아오지 않았다. 책방을 한답시고 밀쳐둔 책을 손에 잡으려 해도, 그마저 쉽지 않아 애를 먹었으니. 마침 눈에 뜨인 것이 보후밀 흐라발이 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소설이었다.
책을 사랑하지만 폐지 처리장에서 일하는 모순을 담담하고 위트 있게 그려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독서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종이책이 사라져 가는 현실을 마주하는 심정이라니. 묘한 동질감이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할까. 매 순간 삶의 부질없음을 마주하면서도, 사무치는 고독과 싸우며, 명징함을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 정말 오랜만에 만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의외의 반전이 가슴 아팠지만, 인간 정신의 승리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식물이 자라는 데 햇빛과 바람 못지않게 물이 필요한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가끔 책방 자리가 났다며 부동산 사무소에서 연락을 보내올라치면 가서 보기만 할까는 생각이 스쳤으니.
이런 비유가 적당할까 모르겠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해 보지도 못하고 방학을 맞은 학생 같은 심정 말이다. 꼭 좋은 성적을 받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냥 멈추고 보니 맥이 풀렸으니. 매사에 심드렁해져서 아무 일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봄 가뭄이 기승을 부린 내내 화단 앞에서도 건덩건덩 물뿌리개를 휘두르기 일쑤였으니. 몇 번 그런 일을 반복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 하나. 가뭄에 방치된 식물에게 얕은 물 뿌리기는 오히려 풀을 죽이고, 더 목마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뭄이 오래되면 웬만한 비로는 해갈이 어렵다는 건 당연한 이치였으니. 기우제를 지내는 심정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된다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