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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남 서촌 그 책방 Oct 30. 2022

매듭 없는 기억


 임마리아의 손녀

 하영남 선생님이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 중 가장 기억에 남은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었다. 연년세세>(황정은, 창비, 2020)를 읽고 모인 날, 점심도 깜빡 잊고 어중간한 오후가 될 때까지 사람들과 온갖 주제를 넘나들며 수다를 떨었다. 추운 겨울날이었음에도 돌아오는 마음에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 열기를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런데 미처 그 자리에서 털지 못하고 남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지금 해보려고 한다. 

의 세 번째로 수록된 작품, 무명>은 이순일의 이야기다. 앞선 두 작품은 작은딸 한세진과 큰딸 한영진의 이야기라 이순일은 딸들의 눈에 비치는 모습으로 등장했는데, 무명>에서는 드디어 이순일의 내면이 드러난다. 그런데 무명>은 앞선 이야기에서 조금씩 언급되었던 이순일의 과거사를 알지 못하면 금방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조금 혼란스럽다. 소설의 전개 방식이 기억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객관적이고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나이를 먹는 것을 막을 수 없고,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자신을 둘러싼 만물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막을 수 없다. 떠난 이 역시 다시 만날 수 없다. 부디 다음 세상이 있어 그곳에서 만나기를 바랄 수 있을 뿐. 과연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음’을, 사람으로 살아가는 누구든 어느 시점엔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이처럼 사람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 수밖에 없다면, 기억이라도 휴대폰 사진첩처럼 우리가 누린 순간을 깔끔히 정리해 준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기억은 그러지 않는다. 기억은 모든 것을 저장할 듯하면서도, 전혀 중요하지 않은 요소만을 남겨 두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어떤 요소들은 완전히 엉뚱한 모습이 되어 있기도 하다. 게다가 기억은 마디마디가 끊긴 채 뒤섞여 있다. 

기억의 원형을 상상해보자. 누군가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 없이, 배웠던 문법을 잊고, 기억이 의식에 떠오르는 대로 말해보자. 목적어와 주어가 뒤늦게 따라오고, 몇 마디 이어지지도 않고, 어떤 장면이 끝나기도 전에 자꾸 다른 것이 딸려와 흐름도 종잡을 수 없다. 마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순자씨의 말처럼. 

작가의 말에 따르면, 황정은은 무명>을 1947년생 순자씨의 회고를 듣고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한때 무명>을 자꾸 끊어지고 흩어지는 순자씨의 입말 그대로 쓰려고 했는데, 이를 그만두고 의 어느 한구석에 그 입말을 남겨두었다고 한다(아마 121쪽에서 123쪽으로 이어지는 부분일 것이다). 작가가 쓰고자 했던 입말은, 그야말로 아무런 필터로 걸러지지 않은 순정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그렇게 썼다면, 누가 그걸 읽을 수 있겠는가? 대단한 참을성과 직감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난 분석력이 없고서야. 작가가 이를 그만둔 것은 납득할 수 있다.

그렇다. 기억은 과거를 담기에는 지나치게 불완전하고 비논리적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 앞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습관이 생긴 건 기억이 치밀하지도, 견고하지도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순정한 형태로 담지 않기로 했다고 해서, 무명>이 기억의 재현을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명>은 평범한 집중력을 가진 독자가 쫓아갈 수 있는 수준에서 기억의 현상을 재현해 독자가 이순일의 기억을 체험하게 한다.

현실의 이순일은 걸음이 불편해 외출이라도 하려고 하면 딸이 조마조마해야 할 정도로 나이 들고 기력이 떨어진 노인이다. 이 소설에 나타나는 이순일의 행동을 나열하면, 이순일은 빨래를 널고, 화분에서 토마토를 따 먹고, 깜빡하고 냉장고에 넣지 않았던 반죽을 발견하였다가, 시장에 가 큰딸 한영진을 위한 등산화를 고르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이 행동 사이사이에 이순일의 기억은 아주 사소한 것에도 촉발되어 이순일의 의식을 채운다. 외할아버지, 피란, 어렸을 적 친구 순자, 화재, 병원 등 이순일이 경험한 순간들은 실제 그 일이 일어난 순서와 상관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이순일은 시공간을 내달아 동떨어진 순간들을 연달아 또는 동시에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면 현실과 기억의 경계, 기억과 기억의 경계가 희미해져서 독자는 그만 현실의 이순일이 뭘 하고 있었는지 까맣게 잊고, 노인이 된 이순일도 잊고 어느새 젊은 시절의 이순일을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이순일의 기억을 따라가던 독자는 어느 순간 신비로운 장면을 맞닥뜨린다. 이미 흘러가 버려 이제는 우주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순간들을 다시 끌어모아 들여다보던 이순일이 과거엔 알지 못한 것을 새로 발견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첫 장면에서 이순일은 아주 어린 시절 눈더미에 내던져져 파묻힌 순간을 떠올린다. 어릴 적 친구 순자가 이순일에게 ‘너는 부모님 중 누구를 더 닮았냐’고 묻기에 떠올린 장면이었다. 

“너는 어머니와 아버지 중 누구를 닮았느냐고 순자가 물었을 때 이순일은 그 순간을 생각했다(88쪽).”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그러니까 순자와 이순일이 모든 것을 함께 하던 시절과 이순일이 순자의 뺨을 치고, 순자네 집에 불이 나 순자가 떠난 날을 모두 통과하여 이순일이 한중언과 결혼하고 아이들이 장성하고, 수십 년 전에 연락이 끊긴 순자가 우선 ‘살아는 있을지’ 궁금하게 될 만큼 이순일이 나이 든 어느 날, 이순일은 우연히 이모를 만났던 때를 순자의 질문과 연결 짓는다. 

이순일은 1987년 생전 처음 이모와 만나던 날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이 자신의 이모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리고 그 순간을 할머니가 된 이순일이 시장에서 등산화를 고르다가 회상하고는 문득 자신은 엄마를 닮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오래전 순자가 물었던 것임을 동시에 깨닫는다.


“그러니까 순자야 /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는 걸 나 그때 비로소(137쪽)”

 이순일은 자신이 누굴 닮았는지 알기 위해 회고에 빠졌던 것이 아닌데, 그저 순간순간 의식을 침범해오는 기억을 따라다니며 생각에 빠졌을 뿐인데, 잊고 있던 기억 속 질문의 답을 찾은 것이다.

무명>의 이 장면은, 이미 흘러가 버린 순간을 동영상 보듯 되돌려 보기만 하는 것은 기억이 가진 능력이 아니라고, 기억의 진정한 능력은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에게 돌아가 그 사람과 끝내지 못한 대화를 마저 이어 나갈 수 있는 데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비논리적이다. 끊기고 흩어져 있다. 이렇듯 기억은 의식의 문법으로는 쉽게 설명하기 힘들기에, 시간과 공간이 그린 좌표에 구속된 존재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순서나 인과가 없기에 기억에서는 손쉽게 모든 것이 연결되고, 기존의 모습이 무너지고 새로운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은 이렇듯 자유롭게 조우하는 기억 속에서 아무것도 새로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은 절대 바꿀 수 없음에도, 무언가를 또 얻기도 한다.

기억 안에서 과거는 닫혀 있지 않고, 과거의 나 역시 박제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기억이 있다는 것은, 무자비한 시간의 손아귀에 절대 붙잡히지 않는 것을 누구나 하나쯤은 품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남은 인생이 조금은 덜 무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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