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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남 서촌 그 책방 Oct 30. 2022

언젠가 나도...!

1. 서촌 그 책방 일일 책방지기 체험일지

2022년 9월 12일 구름 없이 깨끗하게 맑은 날

오전 10:30

책방지기 날짜가 정해지고 작은 공책을 몇 권 만들었다. 오늘 책방에서 책을 구입하는 고마운 사람

들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문을 열고 열심히 만들어온 공책을 책방 선반에 올려두었다. 사람들이 좋아

해주면 좋겠다.

오전 11:00

오픈 시간이 되자마자 모녀로 보이는 두 손님이 들어왔다. 딸인 듯한 손님이 책 한 권을 빼들고 책

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책을 한동안 읽다가 ‘소설 만세’를 구입했다. 책을 계산하는 동안 ‘사과에 대한

고집’이라는 책에 대해 물어보셨는데, 잘 모르는 책이라 설명을 못 해 드렸다. 첫 판매이기도 하고, 답변

을 찾지 못한 질문에 당황하기도 해서 책에 서촌 그 책방 도장을 찍어 드리는 것도 깜박했다.

오전 11:28

책방에 들어오는 골목에 여자 세분이 앉아 골목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무슨 그림인지 궁금하다. 창

가의 책을 교체했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과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을 올려두었다. 두 책 모두 너

무 예쁘고 소중한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어줬으면 좋겠다.

오전 11:57

부부가 들어왔다. 여자 손님이 독서모임에 대한 질문을 했고, 나는 신이 나서 대답해드렸다. 손님이

책장에 붙어있는 책방 선생님의 연락처를 들고 가셨다!

+나중에 생각났는데, 책과 공간이 함께 있다니 너무 좋다며 흐뭇하게 웃고 가셨다.

오후 12:46

잠시 손님이 없는 틈에 발 깔개를 털고 청소기를 돌렸다. 오늘이 연휴 마지막 날이라 사람이 엄청 많

을까 봐 살짝 긴장했는데 아직 생각보다 여유롭다. 산책 한 바퀴 돌고 와야겠다.

오후 1:30

한시에 외출하면서 한시까지 돌아오겠다는 모자란 포부를 당당하게 문 앞에 써서 붙여놓고 산책을

다녀왔다.. 서촌에 오면 자주 들르는 카페에서 달달한 커피 한 잔을 사고 통인시장에서 김밥을 한 줄

사왔다. 통인시장 쪽은 사람이 북적거렸다.

오후 1:39

초등학교 1-2학년 정도로 보이는 딸과 아빠가 들어왔다. 이어서 아이와 한 가족인듯한 할머니와 엄

마가 들어왔다. 책방 일일지기 시작 전에 책방 선생님이 알려주신 스킬을 썼다. 아이와 아빠에게 어린     

이 도서가 있는 곳을 안내해 드렸다. 선생님 말씀대로 아이가 그림책을 보는 동안 엄마, 아빠, 할머니

가 여유롭게 책을 볼 시간을 얻었다. 역시 사장님의 노하우란…! 동화책을 펼친 아이에게 아빠는 책장

의 끝을 잡고 조심조심 넘겨보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네 명의 가족이 네 권의 책을 가져갔다. 너무

보기 좋아서 공책도 네 권 드렸다.

오후 2:19

혼자 오신 여자 손님이 선물할 책을 두 권 골랐다. 나는 서툴지만 열심히 포장해 드렸다. 포장하는

동안 손님이 독서모임에도 슬쩍 관심을 보여 또 신나게 소개해 드렸다.

오후 2:49

남자 손님 한 분이 들어오셨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라는 시집을 찾았는데 책을 못 찾

아서 그냥 되돌아갔다.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한가득이다. 책에 대해 궁금해하는 손님들에게 제대로

응대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책장 구석구석, 모두 내가 잘 알고 있는 책으로 채워진 공간에서 책

방 손님들을 만나는 선생님이 부럽다.

오후 3:17

사람들이 우르르 다녀간 뒤 판매된 책들을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아까 다녀간 예쁜 가족 손님에게

천 원을 더 받았다. 혹시 몰라서 다시 계산해 보니 천 원을 더 받았다. 정말 천 원을 더 받았다! 등에

서 식은땀이 삐죽 흐르는 느낌이다. 책방지기 단톡방에 사실을 알렸다. 모두들 큰 금액이 아니니 괜

찮다고 말씀하셨지만, 실수한 당사자인 나는 불안, 초조, 민망, 죄송스러웠다.

오후 3:40

책방 인스타에 사과문을 올려달라고 부탁드렸다. 꼭 인스타를 통해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다.

오후 4:23

전 직장동료가 방문했다. 전 직장 동료라기엔 이젠 친구지만. 내가 오늘 책방 일일지기를 한다는 소

식을 전한 것임에도, 한 걸음에 달려와주었다. 오전에 출근하며 사온 와플과 커피를 한 잔 드렸다. 오

랜만에 얼굴도 보고 책 얘기도 나눠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책방에서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가져가셨는데, 너무 재밌게 읽으셨다고 한다!

오후 4:30

같이 독서모임에 나오는 친구이자 내 방짝이 호지차 밀크티를 들고 놀러 왔다. 출출하던 차에 반가웠

다.

오후 6:03

아이를 동반한 또 다른 가족이 방문했다. 엄마와 아이가 책을 구경하는 동안 바깥에 놓아둔 의자에

아빠가 앉아서 기다렸다. 잠깐 바람을 쐬고 싶어서 골목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다가 손님이 와서 그대

로 두고 책방에 들어왔는데 덕분에 엄마와 아이가 책을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6-7살쯤 되어 보이는 여

자 아이가 ‘날마다 만우절’ 책이 너무 예쁘다며 만지작거리다가 갔다. 아이에게 맞는 책이 아니라 아쉽

다. 그림책 중에 마음에 드는 책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얼른 자라서 날마다 만우절을 읽을 수 있길.

오후 06:40     

슬슬 책방을 정리할 시간이 되어간다. 해가 지고 골목이 어두워지자 책방의 노란 불빛이 도드라졌다.

만들어온 공책 스무 권 중 두 권이 남았다. 내일 책방지기 하시는 분이나 손님에게 드려야겠다. 싱크대

에 물이 샐까 조심조심 설거지를 하고, 화장실 수건을 교체하고, 책을 정리했다. 오늘은 추석 연휴 마

지막 날이라 오고 가는 손님들이 꽤 있었다. 책을 많이 판매한 건 즐거운 일이었지만 한적한 책방에

앉아 한량처럼 책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조금 아쉬웠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사람이 가장 없을 만한 날

을 골라 오고 싶다.

+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단골손님들이 함께 공간을 돌보는 상황이라니. 귀엽고 소중한 단편영화

한편 뚝딱 나올 것 같은 깜찍한 이야기다.


2. 책방 일일지기는 왜 했을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한 60살쯤 되면 그동안 나를 먹고살게 했던 일 말고, 다른 일을 하며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10년은 지나간 시간 같은데, 30년은 거대한 덩어리의 세월처럼 느껴지

곤 한다. 그래서 30년을 어떤 일로 먹고살았다면, 남은 30년 인생은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다.

‘60살에 하게 될 다른 일은 어떤 것이 좋을까.’ 이 고민은 나의 수많은 공상 중에서 가장 자주 등장

하는 단골 소재였다. 많은 것이 후보군으로 있었지만, 그중 가장 완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건 책방이었

다. ‘나중에 좋은 땅을 사서 1층은 책방이랑 악기 공방, 2층은 설계실, 3층은 집을 짓고 살아야지.’ 하는

허무맹랑하고 무용하지만, 즐거운 공상을 지금도 자주 한다.

올해 3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일을 그만두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참에 책방에 더 가

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상상 속의 책방은 현실과 거리가 있을 테니, 잠시 쉬어가는 동안

에 책방에서 알바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역시 상상과 같지 않았고, 갑자기 5월

부터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었다. 4월 한 달만이라도 꼭 책방을 경험하고 싶었다.

이곳저곳 황급하게 수소문한 끝에 책방지기를 할 수 있는 제주도의 작은 책방을 찾았다. 일에 눌리고

사람에 치였던 시간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다시 일할 기운을 얻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온 서울에서 4월 어느 날, 서촌 그 책방

독서모임을 알게 되었다. 정혜윤 작가님과 저자와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소식에 쌍수를 들고 하겠다

고 달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난 독서모임에서 선생님이 이번 학기를 마치면 잠시 여행을 다녀온다고

했다.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에 책방을 독서모임 회원들에게 맡겨볼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책방 선생님을 만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떤 일을 해볼까 고민 중이라는 말은 곧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과 비슷한 것 같았다. 나는 책방지기를 꼭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서울 한가운

데 있는 책방에서도 책방지기를 해보고 싶었다. 며칠 뒤 단톡방에 책방 일일지기를 희망하는 회원은

신청하라는 공지가 올라왔다. 냉큼 가능한 날짜를 찾아 신청했다.


3. 책방이 왜 하고 싶을까?

정혜윤 작가님의 글 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왜 좋은지 표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글에서 위로를 받았다. 내가 어떤 것을 왜 좋아하는지 당장 몰라도 괜찮고, 알기 위한 시간을 충분

히 가져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누가 왜 책방이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 이유를 마음에 드     

는 문장으로 명확히 표현하기 어려웠다. (누군가 딱히 물어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나만 나에게 물어본

듯하다.)

두세 달 전쯤 ‘고립의 시대’라는 책에서 ‘제3의 장소’에 대한 글귀를 읽었다. 아직 책방에 대한 내

생각을 마음에 드는 표현으로 정리하지 못해 책의 일부분을 가져왔다.

“집도 아니고 직장도 아닌, 하지만 단골들이 만나고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교

류하면서 유대를 형성하고 생각을 교환하고 의견을 나누는, 대화가 꽃 피는 모임공간. 올렌버그는 이

런 공간에서 ‘우리는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고 썼다.”

“제3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마치 독서회에 온 것처럼 아주 다양한 세계관과 삶의 경험을 드러내는 한

편 이 공간이 계속 번창할 수 있도록 서로의 차이를 조율하고 조정하고 이해하고 논한다. 그리고 이

공간은 모두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꺼이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선다. 모든 참가자가 그 공간

에 지분을 갖고 있다. 이 공간에 단순히 들고나지만은 않기 때문에 자신과 개인적으로 관련된 부분뿐

만 아니라 전체의 관점에서 기꺼이 관여하고 듣고 생각한다.”

서촌 그 책방처럼 느슨한 연대로 사람들을 모으는 힘이 있는 공간. 나는 아마도 이런 공간을 만들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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