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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남 서촌 그 책방 Oct 30. 2022

산책의 이정표


결혼 초, 나는 어머님께 최면을 걸었다. 어머님,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저는 콩나물무침을 만들어야 하면, 일단 서점에 가서 요리책을 사야 하는 사람이에요. 청소를 해야 한다면 ‘청소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집 하나라도 읽어야 제대로 할 수 있어요. 그래도, 착해요. 책 좋아하는 사람들 다 착한 거 아시죠? 사실은 최면도 필요 없었다. 우리는 결이 맞았다. 책과 영화와 전시를 좋아하고, 한밤의 달과 구름을 사랑했다. (어머님은 새벽의 해도 좋아하신다. 그리고 그것도 함께하기를 원하시지만, 어머님 저는 저혈압이라…)     

그런 어머님이 2년 전 새해에 꼭 가보고 싶은 공간이 있다며 나를 서촌으로 데려가셨다. 거제도에 혼자 계시는 어머님은 아무래도 좋아하시는 전시회나 공간을 접하기가 요원하셔서 스크랩을 해두신다. 그중에서도 어느 매체에서 보고 한눈에 반한 ‘서촌 그 책방’이 이곳에 있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상호를 듣고 아 잘 기억이 안 나시는구나, 했다. 서촌에 있는 그 책방이라고 하셨나? 일단 근방 오백 미터 책방을 다 찾아본 후에 소개 사진을 보여 드리면 기억이 나시겠지! 이러고 서칭하고 있는데 어머님이 어느 골목 안으로 쓱 들어가시더니 도착했다고 하셨다. (역시 어머님은 확신의 ’T’. 상호명 정확, 위치 이미 파악. 확신의 길치인 내가 늘 감탄하는 부분이다.)     

‘서촌 그 책방’의 첫 느낌은 예쁜 편집숍이었다. 인테리어나 소품 활용이 너무 감각적이어서. 그리고 좀 더 깊숙이 살펴본 후의 느낌은 자부심이었다. 자신이 읽고 좋았던 책만 소개하겠다는 자부심. 과연 어머님이 첫눈에 반할만한 공간이었다. 우리의 사연(?)을 들으시곤 우아한 아우라의 사장님은 너무나 환히 웃어주셨다. 차를 한 잔 마시고 가셔야 한다며 자연스럽게 팬 미팅이 시작되었는데 어머님이 멀리 있어서 자주 못 오는 게 아쉽다고 하시자 사장님이 그럼 독서 모임에 오시라 한마디 하셨다. 지방에서도 오시는 분이 많아요! 어머님은 눈을 반짝거리셨다. 어휴, 아무리 그래도 어머님은 거제도에서 어떻게 매달 올라오시려고. 남편이 수연이도 책을 참 좋아하는데라고… 혼잣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고 어머님과, 사장님이 동시에 나를 보셨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목요일 밤 회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족 대표로 참가한다는 책임감에 시험공부하듯이 전투적으로 책을 읽었다. 독서 모임을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백 분 토론 뭐 그런 건가 했다. 토론 중에 싸움이 나면 어쩌지, 나 싸움 잘 못하는데. 5-6명의 회원이 모여 2 시간 동안 책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고 하셨지. 그렇다면 역시 3:3 구도로 가게 되는 것인가. 그 달의 책은 ‘군주론’ 도 ‘마르크스 자본론’도 아니었다. 이소영 씨의 ‘식물 산책’이었다. 식물 세밀화를 그리는 저자가 자신이 다닌 세계의 식물원을 소개하는 책. 싱그러운 초록 식물들과 화사한 꽃들의 사진이 가득 실려있었지. 하지만, 세상에는 식물원에서도 전투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바로 나, 가족 대표. 이 가족이 위험하다.) 그렇게 나름 역사적인 첫 번째 독서 모임이 시작되었다. 왜 다들 책만 들고 왔지? 내용 정리를 포함한 프린트는? 필기구는?(무기는?) 토론인 줄 알 았는데 산책이었다. 그렇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밤 산책을 나온 거였다. 느긋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런 아름다운 공간에 4쪽짜리 페이퍼처럼 흉한 것을 들고 왔다니. 다행히 사람 수대로 복사해온 그것을 나는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서촌 그 책방’이라는 공간을 떠올리면 나는 이런 이미지가 상상된다. 아껴둔 ‘night off’. (외출이 허용되는 밤, 혹은 비번이란 뜻이다.) 열심히 개미 같은 루틴을 보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서게 된 초가을의 밤 산책. 코스는 정해져 있지 않고 주변이 환하진 않지만, 바람과 공기의 내음이 선명한 산책. 결국은 모든 아침을 새롭게 만드는 밤과 쉼. 그 이후로도 나는 매달 그 밤 산책을 기다리며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좀 더 힘을 빼고, 느긋하게. 그리고 그 산책로는 거제에 사시는 어머님이 알려주신 것.

여기에서 글을 마무리해도 의미는 차고 넘치겠지만 내게는 보너스 같은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작년 겨울에 시작했던 ‘임승훈 작가님과 함께 에세이를’ 이란 수업은 시나리오를 전공했지만, 오랫동안 글을 쉬었던 내게 마중물 같은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마감의 맛이란 어찌나 달콤하던지.(굳이 따지자면 단짠에 가깝다.) 한 번도 나를 소재로 글을 써 본 적이 없었는데 에세이를 완성해 나갈수록 마주하게 되는 이상하고 괴팍하고, 애틋한 어린 시절의 나는 또 어찌나 반갑던지. 그리고 작가와 독자의 역할을 번갈아 가며 쌓은 4명과의 우정 역시 큰 수확이었다. 술을 궤 짝으로 마셔도 볼 수 없는 다른 이의 가장 여린 면을 서로에게 공유하는 수업이었다. ‘이 문장은 뒷문장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라고 코멘트하면서 마음으로는 ‘너무 이해돼요. 너무 응원해요.’라고 외치게 되는 수업이었다. 또한 책을 사랑하고 곁에 끈덕지게 두었던 사람들이 어떤 공통된 저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나이와 성별, 직업을 어떻게 관통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시간이었다. 이 외에도 사실 너무 많은 순간들이 있지만 임 선생님께서 너무 많은 에피소드를 나열하면 글을 읽는 독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다고 하셨으니 이쯤에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요즘 애들은 ‘또 오셨네요.’라고 가게 사장이 아는 척을 하면 발길을 끊는다고 한다. 요즘 애들은 아니지만, 나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최초의 단골집이다. 아는 척 빨리해주시라고요! 라며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유일 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곳은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의무적으로 한 권의 책을 사야 한다. 두 권이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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