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와서 이것 좀 읽어봐요!”
낭랑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그녀가 나를 부른다. 어른들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이것 좀 먹어봐’ 보다 더
교양 있고 멋스러운 권유의 문장이다. 글에 대한 안목이 높은 그녀는 수많은 책을 읽고 선별해서 많은 사람
에게 추천하는 것이 일과다. ‘서촌 그 책방’의 주인이 되기 전에도 수년간 독서가 몸에 밴 사람이었으니, 허
접한 글을 보여주려고 나를 부를 리 없었다. 신뢰의 증표로 그녀가 건네주는 잡지를 선뜻 받아서 들고 그
자리에서 정독한다. 위트와 패기가 넘치는 젊은 신인 작가의 기고 글이었다. 덕분에 앞으로 눈여겨볼 작가
하나를 발견한 셈이다. 그녀는 고리타분한 ‘라떼’를 찾지 않고도 젊은 세대와 대화를 나눌 줄 아는 어른이다.
나는 이런 어른 몇몇을 더 알고 있다.
책방 독서토론에서 만난 사람들의 정확한 나이는 여전히 모른다. 한두 명 빼고는 나보다 최소 10살은 많다
고 예상한다. 고작 몇 살 차이라면 가늠하는 의미가 있겠지만, 초등학생 조카가 서른 살 넘은 삼촌 나이에
별 관심 없지 않은가? 여하튼 나보다 ‘훨씬 어른들’ 정도로 내 머릿속엔 정리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어르신
이나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언니라고 하기에는 조금 민망하고, 여사님이라고 부르면 뭔가 모셔야
할 것 같고… 마땅한 호칭을 찾을 수 없었다. 조선의 꽉 막힌 존칭 문화가 쓸모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어느 날,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그녀들을 칭할 적당한 개념이 생각난 것이다. 바로 ‘연상의 친구들’이
다. 이렇게 정하고 나니까 호칭도 편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는 주로 이름을 부르지만, 많게는
서른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분들의 이름을 막 부르는 것은 대한민국에선 아니 될 일! 모르는 사람에겐 내가
무뢰한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OO 씨’가 적당할 것 같았다. 그녀들은 무엇으로 불러
도 좋다고 흔쾌히 허락해줬다. 엄마뻘 그녀들에게 ‘OO 씨’라고 부르는 게 조금은 어색하지만, 곧 자연스러워
질 것이다. 이름 불러주니까 좋다는 그녀들의 밝은 얼굴이 이런 사소한 시도를 보람있게 만들어준다.
연상의 친구들은 책방을 운영하는 영남씨를 포함해 모두 여섯이다. 그녀들을 다른 무엇도 아닌 ‘친구’로 칭
하고 싶던 이유는 선을 지키는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인생을 오래 살아봤다는 이유 하나로 조언을 가장한
무례를 범하지 않는 교양과 품위가 그녀들에겐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화도 무척 즐거웠다.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한 꼬집 정도는 가셨다. 언젠가 한 번은 나의 고민도 털어놓았
다. 연상의 친구들은 이래라저래라 하는 대신에 자신들이 살아왔던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줬다. 가장 힘이 되
었던 건 인생의 치열한 시기를 지나 마침내 되찾은 평온을 몸소 보여준 그녀들의 현재였다.
속단하지 않고 경청해주는 것만으로도, 한참 먼 세대와 이렇게 평등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해 준 고마운 친구들이다. 만나면 늘 유쾌했고 마음이 따듯해졌다. 물론, 종종 충격적인 격세지감을 느
낄 때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한 연상의 친구의 어린 시절, 동네에 살던 어떤 할아버지가 성냥으로 귀를 후
비다가 잘못되어 돌아가셨다는 추억담을 나누던 중이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면봉이 있는데 왜 위험하게 성냥으로 귀를 후벼요?”
“우리 어릴 땐 면봉이 없었거든요.”
그렇다. 별것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세대 차이는 고작 이런 것에 불과하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