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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남 서촌 그 책방 Oct 30. 2022

내가 찾던 떡볶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해외 거주 기간 동안 가장 목말랐던 두 가지가 떡볶이, 그리고 우리말이었다.

다양한 문화를 품고 있는 런던에서 한국 음식점이나 떡볶이 재료를 찾는 게 미션 임파서블의 영역은

아니었지만 ‘이거지!’ 하게 되는 떡볶이는 끝내 만나지도, 만들지도 못했다. 그게 두고두고 아쉽고

그리웠더랬다.

랭귀지 스쿨 연계 기숙사에서의 계약 기간이 끝나가던 2월, 옮겨갈 곳을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드디어

정 붙이고 싶은 동네를 발견했다. 집세가 만만치 않아 살만한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거의 놓고

있을 때쯤 그 동네에서 오랜 시간 터를 잡고 살아온 한국인 아주머니를 알게 되었다. 아들과의 세계 여행을

앞두고 계셨던 아주머니는 장기간 비어있을 집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내놓으셨고, 나와 몇몇 한국인

친구들을 들인 후 세상 가뿐한 얼굴로 여행을 떠나셨다. 그렇게 하우스메이트들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집 안에서는 하메들과 한국어로 자유롭게 소통했지만, 영국은 엄연한 영어의 나라. 스위치를 영어로

전환하여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두 배, 세 배로 피로가 몰려왔다. 무한히 반복되는 짧은 어휘들을

그나마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해 아주 기본적인 의사 표현마저 삐걱거리기 일쑤였다. 과도한 의식과

긴장과 자책으로 기진맥진해져서 돌아올 때면 집에 들어가기 전, 현관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하메들의 복작복작한 발걸음 소리, 두런두런 나누는 우리말 소리에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열쇠를 밀어 넣곤 했다.

하메 친구들과는 주로 일상생활,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식지

않는 우리말에 대한 갈증을 한국 드라마나 예능, 한인 커뮤니티에 중고로 드문드문 올라오던 한글책들로

마저 채워 넣었다.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목마름이 저절로 해소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독서 모임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모임은 웬만해선 강 건너에서 열리거나(체질적으로 사대문 밖을 벗어나는 게 너무 힘들다) 직장인들을          타깃으로 저녁 늦은 시간에 시작하거나(당시 나는 백수였다) 경제, 자기 계발 등 실용서 위주로 도서 목록을

꾸리고 있어 눈에 차지 않았다.

중학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우리은행 뒤편 골목길을 지나던 중,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없었던 아담한

책방을 발견했다. 유리문 앞에 붙은 독서 모임 안내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박수가 빨라졌다. 문이

닫혀있어 안내문 하단에 적혀있는 핸드폰 번호로 설렘 반, 걱정 반이 담긴 문자를 보냈다. ‘언제든 오라’는

답장에서 호쾌함이 묻어났다. 그렇게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말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뭉뚱그려진 생각이 성대를 타고 나오면서 말로 쫙쫙 펴지는 맛을 느끼고 싶었다.

분방하게, 거리낄 것 없이 우리말을 하고 싶었다. ‘서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방’과 선생님의 존재가 그런

내게 또 한 번의 오아시스를 선사했다. 함께 읽은 책을 시작점으로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각자의 말을

펼쳐 서로의 말을 쌓아갔다. 나도 책에 대한 내 생각과 느낌을 곱씹고 가다듬어 바깥으로 내보냈다.

모국어라고 해서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지는 않았다. 말들은 가끔만 의도했던 방향으로, 대체로 구멍 나고

비뚤어진 상태로 입 밖을 배회했다. 그래도 좋았다.

전방만 주시하고 있던 나의 주변 시야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는 분들의 말을 나도 귀담아듣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깨닫지 못했던 사고의 사각지대들이

사람들의 말을 통해 자연스레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서촌 그 책방’을 들락날락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내 안에서 책방이 차지하는 존재감도 부쩍 커졌다.

선생님이 이탈리아 여행으로 자리를 비우시는 동안 책방지기가 되어 책방을 지키고 보살피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한 곳에 정착해 오래도록 시간을 들이는 것도, 팔 걷고 나서서 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해나간다는 것도 내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마 ‘서촌 그 책방’이라는 대전제가 붙으면 이런 낯선

경험을 몇 번이든 더 하게 되리라 짐작한다.

런던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떡볶이는 어떻게 됐냐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매콤 쌉싸름한 양념에 빨갛게

물든 쫀득쫀득한 떡, 양념이 잔뜩 배 무겁게 늘어진 어묵을 입 안에 가득 넣어 씹고 삼키는 과정이 꽤 여러

번 있었지만 내가 갈구했던 떡볶이 맛은 아직 찾지 못했다.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환상을,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억으로 착각하여 헤매고 다닌 걸지도 모르겠다. 말맛, 책 맛이 살아 맴도는

‘서촌 그 책방’을 만났으니 그리워하던 떡볶이 맛을 영영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가볍게 입맛 한 번 다시고

책방으로 향하면 그만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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