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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남 서촌 그 책방 Oct 30. 2022

냄비와 모래시계

독서모임을 신청하면서 준비물이 있는지 묻는 분이 종종 있다. 책을 잘  읽어오기만 하면 된다 한다. 엄밀히 말하면 준비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질문자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아직 모르니 섣불리 답 할 수가 없다. 혹자는 무슨 준비물을 사람 봐가며 다르게 말하느냐 하겠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선뜻 입을 열기 망설여진다. 정말이지 사람에 따라 준비물 구성이 다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독서모임에 참석해서 토론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런 차별 대우가 어디 있느냐고 항의해도 어쩔 수가 없다.


기본을 잘 지키기만 하면 사실 특별한 준비물은 없다. 이미 몸에 장착된 감각기관 만으로도 충분히 기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책을 잘 읽어 오라는 말은 눈을 잘 활용하라는 말이다. 모임에 참석해서는 귀와 입을 적절히 열었다 닫았다 하면 별 문제가 없다. 독서모임을 해보라고 하면 "어머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잘 못하는데 괜찮을까요?" 하는 분, 대체로 말을 못 하지 않는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누누이 말했지만 말을 잘 못한다는 표현에서 강세가 들어간 음절은 '잘'에 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파악한 바, 말하기에 좀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가만 두어도 의견을 술술 풀어낸다. 낯선 사람과도 잘 사귀고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한다.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말, 대체로 맞다. 선을 넘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어느 정도 토론이 익숙해지면 발언권을 독식하는 사람이 생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일에 촉이 가장 예민한 사람이 바로 나다. 누군가 말을 시작하면 나는 그의 눈을 응시한다. 집중해서 듣고 있다는 표시이다. 그러다 얘기가 지나치게 길어지거나 사변으로 흐르면 슬그머니 고개를 숙인다. 일종의 경고등인 셈이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속으로 빈다. 그래도 화자가 전혀 눈치를 못 채면, 이번에는 청중의 표정을 슬쩍 살핀다. 대개 약간 힘들다는 반응을 보인다. 내가 개입해서 말을 자르거나 언질을 주어야 할 시점이다.


상처받지 않도록 은근히, 톡 건드리는 수준으로 가볍게 잘라야 한다. 이게 마냥 쉽지만은 않다. 신나서 말하는 사람의 흥을 깨는 일, 누군들 즐겁겠는가. 한동안 모래시계라도 두어야 할까 고민한 적이 있다. 이 작은 유리병에게 매번 할당량을 알려주고, 내가 나서지 않아도 말을 끊어주면 얼마나 편할까. 그렇지만 말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시계 눈치를 볼 것이고, 듣는 이는 제대로 경청이 될지 의문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작은 유리병에 전가시키고 팔짱 끼고 있으려면 뭐하러 독서모임 진행자로 나섰나? 하는 일말의 양심이 발동해 오늘도 현장에서 매의 눈으로 두루 살핀다. 가위손을 뒤춤에 감춘 채. 말이 잘렸다는 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 상대가 숨을 들이켜는 그 찰나의 순간을 잡아서, 내 날숨을 꽂는다.


TV에서 두 진영의 정치가들이 나와서 열변을 토할 때 마이크를 끄는 것으로 시간 초과를 알려 주는 경우가 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을 때가 있었다. 인간이 저것 하나 지키지 못해 기계의 힘을 빌리다니. 모두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꺼진 마이크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정치인은 더 볼썽사납다. 주장의 옳고 그름은 둘째이고 저렇게 기본적인 배려심도 없이 무슨 정치?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가끔 정말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친 보수 논객 뒤의 진보 인사가 너무 신사적으로 정한 시간에 마이크를 내려놓는 걸 보면, 이건 또 좀 답답하다. 저 험악한 바다에서 저리 원리원칙만 지켜서 무얼 쟁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니. 나이 들수록 푸근해지기는 커녕 요구조건이 까다로워지는지는 나, 역시 대략 난감이다. 쩝!


독서모임 회원 중에서도 말문이 터져서 신나게 발언하는 분이 가끔 있다. 묵힌 감정을 유감없이 풀어내는 걸 보는 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여태 참느라 힘들었겠다고 호응하며. 그러나 매번 한 사람의 등만 토닥일 수는 없다. 이번에는 다른 회원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독서모임에 참석한다는 것과 누군가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사실 같은 맥락이다. 나도 발언권을 가지고 싶다는 뜻의 다른 표현. 듣는 이와 말하는 이가 균형 있게, 누구도 서운하지 않게, 골고루 주거니 받거니에  이르기를. 그러나 이건 말처럼 쉽지 않다. 모든 사람이 합리적인 선택을 하면 더없이 좋으련만. 그래서 나는 매번 속으로 주문을 건다. '독서모임 오실 때 눈치껏 모래시계를 장착하고 오세요. 제발!'


사실, 정말 힘든 일은 빗장을 잠근 사람의 무거운 말문을 여는  일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단순히 수줍어서 발표를 두려워하는 사람과 아예 준비를 안 하는 사람이 있다. 수줍은 사람은 진행자가 질문을 잘 준비해서 유도하면 어느 정도 마음을 연다. 내성적이어서  표현을 는 것뿐, 내심 잘하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다. 독서모임 신청이 일종의 의사표현인 셈. 말은 없지만 둔감한 사람은 아니다. 은근히 상처를 잘 받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누구보다 스스로 꼼꼼히 준비를 해 오는 유형이 많다. 그래서 슬쩍 물꼬만 터주면 의외로 졸졸졸 청산유수,  얼마 지나지 않아  귀여운 수다쟁이가 되기도 한다.


가장 어렵기로는 듣기만 하겠다며 소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분이다. 이런 분이 한 회차에 여럿이면 배가 산으로 가거나 난파한다. 대개 완독을 못했거나, 집중해서 읽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고도 번번이 귀만 가지고 참석하면, 진행자 입장에선 좀 난감해진다. 물론 본인이 가장 답답할 노릇일 것이다. 누군들 이런 행위가 즐겁기야 하겠는가. 정말 바빴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동안  참지만 이 행동이 잦으면 내가 자책에 빠진다. 선정된 책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독서모임 자체에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은 아닐까? 심히 안타깝지만 그간의 경력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 자괴감이 생긴다.


아주 드물게 정말 정성껏 준비했으나 아무 발언을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분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구석으로 파고든다. 마음이 짠해진다. 이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일이 강사의 역할이 아닐까?  나름 열심히 독려하지만, 독서모임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분도 꾸준히 책을 읽고, 참석하기만 하면 입이 열린다. 지성이면 감천, 느리거나 늦을 수는 있어도 책에 진심을 보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말문은 자연스럽게 트인다. 수줍게 첫 말을 뱉고 살짝 미소 지을 때, 나는 진심으로 뿌듯해진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읽혀 괜히 코끝이 찡해지기도 하고.


독서모임은 뭐랄까 일종의 포트럭 파티 같은 것이다. 각자가 주체자인 잔치. 나는 장소를 물색하고 테이블 세팅을 하는 기획자 일 뿐이다. 잔치 참여자에게 하는 단 하나의 주문, 각자의 냄비를 지참하라는 것.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을 준비하라 요구할 수는 없다. 내용물은 알아서이다. 자고로 포트락 파티의 매력은  무슨 음식을 먹을지 모르는 상태가 주는 기대감 아닌가. 책에 소개된 내용뿐 아니라, 온갖 매체를  뒤지고 준비해서 풍성한 냄비를 가져온 사람이 뚜껑을 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환해진다. 독서모임에서 핵인싸가 되는 비법, 별것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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